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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보건과 젠더 - 7 국제보건 건강 개입에서 젠더 관점

기획 [의료, 젠더를 말하다] 13 건강미디어l승인2019.02.04l수정2019.06.02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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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새롬

예방의학 전문의, 시민건강연구소

(5) 국제보건 건강 개입에서 젠더 관점

1995년 북경 세계여성대회에서 젠더 주류화 채택 이후 국제개발 원조와 국제보건에서 젠더 관점을 적용해야 한다는 합의는 일반적이다. 한국 국제개발 협력 영역에서도 2011년 한국국제협력단이 성 인지적 공적개발원조를 위해 「성 주류화 가이드라인」을 수립했고, 2014년 국무조정실이 「성 인지 관점에서 ODA 사업 평가 연구」를 수행하는 등 성 인지 관점에서 공적개발원조 사업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OECD는 회원국의 성평등 원조 활동을 기록하는 도구로 젠더 평등 정책 마커Gender equality policy marker를 측정하는데, 이는 성평등 및 여성 임파워먼트에 기여하거나, 성 불평등과 차별을 감소시키는 개발원조 활동의 정도를 측정한다. 2017년부터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근절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업을 별도로 측정하는 코드가 도입되어 앞으로 관련 현황을 추적할 수 있을 예정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국제보건과 개발에서 한국 정부의 젠더 평등에 대한 인식과 노력은 미비한 편이다. 2014-2015년 기준 OECD DAC 회원국의 젠더 평등과 여성의 임파워먼트를 지원하는 원조 사업 예산 비율은 평균 35%였으며, 한국의 젠더 평등 예산은 12%로 최하위 수준이었다. 한국의 성평등 원조 사업에서 보건은 23%, 인구 정책과 재생산 건강은 7.9%를 차지했는데, 이는 젠더 평등 예산이 80%를 넘어서고, 모든 개발원조 영역에서 성평등 예산이 고르게 분포하는 스웨덴과 대비된다. 한국의 젠더평등 사업은 보건분야에 모자보건 사업과 의료 인력과 보건의료 체계 사업, 인구 정책과 재생산 건강 분야에 에이즈 감염 여성 지원, 재생산 건강 캠페인, 모자보건과 가족계획, 성 건강 증진 사업, 모자보건과 임산부와 신생아 건강 사업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항목에서 볼 수 있듯 기존의 젠더평 등 예산은 주로 전통적인 모성과 관련된 내용을 다루고 있다. 한 연구에서는 한국의 ODA 담당 공무원들을 인터뷰한 결과 이들이 젠더 평등과 젠더평등 정책 마커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서 해당 지표를 정확하게 보고하는 데에 실패하고 있다고 판단한다.(1) 

적극적으로 적용되고 있지 못한 상황이기는 하나 한국 정부는 성 주류화 전략을 추진하기 위해 국내외의 사업들에 대해 성별영향평가Gender impact assessment를 도입하기도 했다. 관련해서 에티오피아에서 실행된 가족계획과 모자보건 증진 사업을 대상으로 ① 성별요구도-여성과 남성의 서로 다른 차이(필요와 행태)에 대해 파악하였는지, ② 성별 형평성- 수혜자 선정에 있어서 성별을 고려하였는지, ③ 성평등 실현을 위한 조치 사항을 제시하였는지 등에 대한 후향적 평가를 실행한 연구를 찾아볼 수 있는데, 연구에서는 한국의 국제보건 사업에서 전반적으로 성 주류화 전략이 충분히 적용되고 있지 못하며, 국제원조 사업에 대한 성별영향 평가 역시 그리 적극적으로 수행되고 있지 못한 상황을 보여준다. 범부문적 사안인 젠더를 농업, 보건, 교육 등 다양한 국제개발 분야에 주류화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전략이 도리어 젠더와 관련해 제대로 된 목표와 예산을 설정하지 않는 젠더 주변화로 이어지고 있다는 우려도 되새겨야 할 만한 지점이다.(2) 
 
공적원조 사업의 80% 이상이 젠더 평등 예산으로 집계되는 스웨덴의 경우 대부분의 공적개발원조 프로그램에 대해 젠더 관점을 적용하고 있는 셈인데, 한국에서도 이와 같이 사업의 내용이나 분야와 무관하게 모든 개입에서 성 인지적 관점을 도입해나가야 한다. USAID와 같은 원조 기구는 개발 사업과 보건의료 개입에 성 인지적 관점을 도입하기 위한 틀로 젠더 평등 연속선 도구Gender equality continuum tool을 활용하고 있다.

(자료: USAID(2014), To be (gender aware) or not to be (gender blind); that is the question!)  
  
젠더맹Gender-blindness 또는 젠더 몰이해한 관점은 젠더에 따라 서로 달라지는 경제적· 사회적,정치적 역할, 권리, 자격, 책임, 의무의 차이를 무시하고, 여성과 남성, 소년과 소녀 간의 권력 관계에 대해서 고려하지 않는 관점이다. 이런 관점으로 사업을 기획하는 경우 기존의 젠더 관계를 도구적으로 활용하는 젠더착취적Gender exploitative 개입이 이루어질 수 있다. 모자보건개입에서 “어떤 엄마가 아이에게 HIV를 물려줄 수가 있냐”는 호소 하거나 성병 예방 캠페인에서 '남자다움'과 성병에 대한 '정복'을 강조하는 것은 기존의 젠더 권력 관계를 착취하는 건강 개입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젠더 몰이해에서 벗어나 일상과 제도를 구성하는 젠더 관계에 대해 의식Gender aware하는 것은 젠더에 민감한 방식으로 건강 개입을 기획하기 위한 시작이다. 젠더 순응적Gender accomodating 접근은 젠더에 따른 차이를 인식하지만 적극적으로 불평등을 해결하기 보다는 젠더적 차이를 고려하는 수준에 그치는 단계다. 지역사회에서 여성들에게 피임약을 나누어 주면서 남성들에게도 가족계획과 피임의 중요성에 대한 교육과 옹호 활동을 한다거나, 콘돔 사용률이 100%인 집창촌의 리스트를 공개한다거나 하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보다 적극적으로 억압적인 젠더 규범을 변화시킴으로써 건강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방식도 있다. 젠더 변혁적Gender-transformative 접근은 기존의 젠더 규범과 역학 관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젠더 평등을 지지하는 실천, 관계, 구조를 강화·생성하고자 한다. HIV/AIDS 와 가족계획 사업에서 젠더 규범과 젠더 기반 폭력을 다루는 커플 상담을 진행하거나, 여성 HIV/AIDS 환자 건강 개선 사업에서 젠더 평등과 재생산 권리에 대한 여성 의식화 조직을 운영하고 여성 조직과 NGO에 산부인과 전문 의료진을 연계하고, 기존의 젠더 규범에 대해서 논의하고 비교할 수 있도록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소집단 토론을 진행하는 것 등이 대표적인 젠더 변혁 접근의 전략이다. 
  
건강 사업에서 젠더 관점 도입은 젠더 착취적인 접근을 지양하고, 어떤 개입으로도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Do no harm는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 개별 활동과 사업들은 각각 젠더 평등 연속선 도구의 서로 다른 단계 위에 있을 수 있지만, 모든 개입에 있어서 젠더에 대해 의식하고 가능한 젠더 변혁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4. 나가며

국제보건에서 젠더를 생각하고 성 인지적 관점을 도입하는 것은 당연하고 규범적인 당위를 가지지만 녹록치 않은 과제다. 지금까지 우리가 익숙한 의료와 보건의 지식과 실천들은 대체로 젠더에 민감하지 않은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으며,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기존의 지식들을 재구성하고 실천을 변화시키는 것은 복잡하고 어려운 과제가 될 것이다. 억압적인 젠더 관계를 변화시켜나가는 동시에 여성을 포함한 취약한 집단의 건강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건강과 보건의료, 건강 정책 그 자체를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재구성해나가야 한다.
  
국제보건 영역과 젠더 평등과 여성의 임파워먼트를 어떤 층위에서 통합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젠더 평등과 여성 임파워먼트는 건강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달성해야 할 내재적 목표다. 이를 국제보건의 전략으로 삼음으로써 여성의 임파워먼트를 도구화하거나 협애하게 해석할 위험이 따른다면 이를 바람직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건강 영역에서 젠더와 페미니즘적 관점에 대한 기존의 지식이나 경험이 초보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상황도 낙담하기 보다는 진취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제보건과 젠더, 페미니즘이 교차하는 공간을 새로운 기회와 도전들이 산적해있는 장으로 보고, 기존의 국제보건이 실패하거나 묵인했던 영역을 변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관점으로 페미니즘과 여성 임파워먼트를 진지하게 탐색하고 고민해야 한다. 
  
일례로 국제보건 영역은 흔히 국가가 주체가 되는 공적 원조 영역을 중심으로 제도화된 방식의 개입들을 논의하는 경향이 있는데, 최근 정치적 힘을 키워가고 있는 영페미니스트들의 운동은 시민사회 영역에서 여성들의 전세계적 연대와 협력이 어떻게 국경을 넘어 여성들의 삶과 건강을 개선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안전한 임신중지 합법화 켐페인을 벌이고, 도움이 필요한 여성들에게 상담과 의약품을 제공하는 비영리 조직인 파도 위의 여성들Women on waves과 우먼온웹Women on web은 국가가 보장하지 않는 여성들의 건강권을 보장하기 위해 여성들의 지식과 운동이 국경을 넘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지구화는 불평등을 강화하고, 억압적이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측면도 있지만, 그와 반대로 경계를 넘어서는 부정의에 대항하는 초국적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만들어 냈다. 동질화를 함축하고 있는 세계화의 관념에 물음표를 달고, 세계의 복합성과 불균등성을 강조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자본, 기술, 인간, 지식, 정보, 이데올로기 등이 어떻게 국경을 넘어 연결되면서 혹은 단절되면서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주목하기 위해 ‘초국적Trans-national’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이들은 국가, 지역, 문화, 역사적 경계를 넘어 다양한 여성들의 경험을 맥락화하고, 다름에 기반을 둔 여성 간의 연대를 통해 경계를 넘어서고자 한다.(3) 

이렇게 국민국가를 넘어서는 상상력을 요구하고, 경계의 실질적 작동에 주목하는 초국적 페미니스트 정치학의 경험과 지식은 전 지구적 협력을 통해 인구집단 사이의 건강 불평등을 해소하고, 불평등을 야기하는 부정의한 구조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국제보건의 이론과 실천을 상상하는 데에 유용한 길잡이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각주

(1) 김은경, 장은하, & 김정수, 젠더마커 기준에 따른 한국 성평등 ODA 의 특징과 한계」, 여성연구, 7-35, 2016.

(2) 권문영, 한승헌, & 강민아, 보건분야 ODA 사업에 대한 성별영향분석평가: KOICA 에티오피아 아르시존 가족계획 및 모자보건 증진사업에 대한 시범적용」,여성연구, 239-279, 2015.

(3) 이나영, 「초/국적 페미니즘」, 『경제와 사회』, pp.63–88,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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