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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전쟁, 재생산정의를 둘러싼 여성‘들’의 분투

임신중지와 출산의지가 혼재된 전장(戰場), 여성‘들’의 몸 건강미디어l승인2024.04.01l수정2024.04.01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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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아정 독립연구활동가

 

<방글라데시 내전시기 국제사회에서 최초로 ‘문제화’된 전시성폭력과 임신중지의 기획들>

1971년 12월 22일자 뉴욕포스트에 ‘영웅으로 불리는 강간당한 뱅골 여성들(Raped Bengalis Called Heroes)’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1] 방글라데시 해방전쟁 기간 동안 수십만 명의 여성이 파키스탄 군대에 의해 강간을 당했다. 자국 여성에 대한 대규모 강간사태에 대해 방글라데시 정부는 피해여성에게 ‘비랑고나(Birangona)’라는 칭호를 부여했는데, 이는 벵골어로 ‘용감한 여성’을 뜻한다. 그러나 이 호명은 점차 ‘불명예스러운’ 또는 ‘침해당한 여성’을 의미하거나, 강간, 임신중지, 자살을 상기하는 표현이 되어 갔다.[2]

 

비랑고나 이야기를 다룬 연극이 2014년에 런던에서 상연되었다

 (사진출처: “Bangladesh’s Birangona women:Tell the world our story”, The Guardian, April. 15. 2014)

 

여성이 외부로부터 격리된 채 살아가는 전통적인 벵골 촌락 사회에서 강간 피해생존자는 외면당하기 일쑤였다. 이에 당국은 ‘영웅 선언’을 통하여 그녀들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남편과 아버지 그리고 마을 사람들과의 ‘재통합’을 꾀했지만, 무슬림 남편들은 자신의 아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9개월의 분쟁 기간 동안 강간당한 20만여 명 중 2만 5천여 명이 임신을 했고, 당시 피해 생존자들이 무엇보다 원했던 것은 다름 아닌 ‘임신중지’였다.

경제력 있는 집안의 여성들은 캘커타의 병원으로 보내져 수술을 받았지만, 그렇지 못한 여성들은 출산을 위해 인도로 이주하거나 자살과 영아살해를 시도했다.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여 벵골 출신 여성 전문가들은 ‘사회 복귀’를 위한 모임을 만들어 임신중지 시술과 직업훈련에 조력하며 연대했고, 런던, 뉴욕, 로스엔젤레스, 스톡홀롬 등지에서 페미니스트 단체가 이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기구를 만들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전시성폭력에 초점을 맞춘 초국적인 연대가 모색된 것이다.[3] 

대규모 전시성폭력은 이전에도 있어왔지만, 방글라데시의 사례는 역사상 처음으로 그 복합적인 후유증까지 포함해 전시성폭력과 대규모 강간이 국제사회에서 관심을 받았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1971 년은 미국에서 강간위기센터가 문을 열었고, 토론의 장(場)에서도 강간은 ‘성행위’가 아니라 ‘성범죄’로 새롭게 정의되는 등 성폭력이 ‘범죄’라는 인식이 가까스로 확보된 시기다. 수잔 브라운 밀러는 무엇보다 당시의 페미니즘 운동이 강간을 정치적인 문제로 보는 새로운 인식을 가능케 하고, 원치 않는 임신의 해결책으로서 임신중지를 실용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든 덕분에 대규모 강간 사태에 주목하는 국제 공조라는 결정적인 진전이 이루어졌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4] 

  

<패전 후 귀환과정에서 강간당한 일본 여성들의 임신중지와 우생보호법의 길항>

 

그러나 임신중지에 대한 여성들의 바램은 재생산 통제를 위한 국가 정책과 길항하며 때로는 포섭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후츠카이치 보양소’(二日市保養所)는 일본의 패전 후 만주와 조선 등지에서 귀환하는 과정에서 강간 피해를 당한 일본인 여성들의 임신중지와 성병 치료를 목적으로, 후생성 인양 원호청이 비밀리에 후쿠오카현 치쿠노시(福岡県 筑紫野市) 에 설치한 의료시설이다.

이곳에서만 약 400~500명의 임신중지 수술이 이루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만주, 중국 대륙, 조선, 대만 등 ‘외지’에서 ‘내지’로 귀환한 일본인은 500만을 웃돈다. 이들을 맞이하는 항구 주변에는 후츠카이치 보양소와 같은 의료 및 수용시설이 개설되었지만, 이곳에서 겪은 여성들의 경험은 일본 전후사의 관심사에서 주변화되어 왔다. 

 

1977년에 촬영된 후츠카이치 보양소 모습. 1977년에 폐쇄되었다

(사진출처: 西日本新聞 https://www.nishinippon.co.jp/image/665784/ )

 

특히, 후생성의 관련 자료에서는 귀환과정에서 발생한 원치 않은 임신을 ‘불법 임신’이라는 표현으로 명명하고 있다. 전쟁 과정에서 강간 피해를 당한 여성들의 몸을 ‘불법’으로 호명하는 것은 패전과 그에 따른 결과로 발생한 폭력의 책임을 여성들에게 전가하는 저열한 국가적 기획에 다름 아니다. 전시에 “악질적인 유전 질환의 소질이 있는 보유자의 증가를 방지함과 동시에 건전한 소질의 보유자의 증가를 도모해서 국민의 자질 향상을 돕는다”는 목적으로 규정된 <국민우생법>, 즉 ‘낙태죄 체제’ 하에서 임신중지는 불법행위였고, 시술을 감행한 의사 또한 형사처벌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귀환 여성의 임신중지의 경우는 규슈 대학 등의 국립병원에 후생성으로부터 비밀 명령이 내려져 묵인되었다.

실제로 임신중지에 관여했던 한 관계자는 이러한 국가적 기획이 “일본 정부가 부모 없는 혼혈아의 출생과 성병의 증가를 막기 위해 고안한 ‘국경 전략’이라고 불러야 할 ‘예방’의 방법"이며, 후생성과 정부 관리들은 이러한 ‘초법적 조치’를 지지했고, 이는 결국 “일본 국민의 순혈을 확보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5]

당시의 후츠카이치 보양소에서 임신중지 수술에 참여한 간호사 요시다 하루요(吉田ハルヨ)는 강간피해로 임신한 여성들 대부분이 말을 잃은 상태였고, 마취약도 제대로 구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수술을 받으면서도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고 증언하는 한편, “이들의 경우는 자신들이 원해서 성매매를 한 결과로 임신한 ‘팡팡’[6] 과는 다르다”는 점을 굳이 강조하기도 했다.[7]  패전 직전 만주에 있던 일본인들은 소련군의 참전으로 대혼란을 겪었다. 재류 일본인들은 난폭한 소련군이 들이닥치면 일본인 여성은 강간을 당한 것이라는 불안이 커져, 소련군에게서 일본인 부녀를 지키기 위해  ‘희생해 줄 여성들=여자특공대’를 편성하자는 의견을 ‘일본인’ ‘위안부’에게 제안했고, 이에 열세 명의 여성들이 ‘자진’할 수밖에 없었다.[8]  앞선 간호사의 증언과 함께 이러한 역사는 일본 사회에서 만연했던 창부 차별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외지로부터 귀환하는 여성들과 미군 점령하에서 성매매로 생계를 이어가던 여성들의 임신중지가 크게 늘었던 시기에 일본의 인구정책은 ‘낳자 늘리자’에서 인구억제정책으로 전환된다. 1948년에 공포되고 시행된 <우생보호법>은 임신중지의 자유를 말하면서도 국가가 허락하는 임신중지의 범위를 한정 짓는, ‘재생산권의 통제’라는 이면을 갖는 법이다. 후지메 유키는 이러한 <우생보호법>에 대해 “불량한 자손을 배제하기 위해 낙태를 허가한다는 낙태죄의 보완법이며, 우생학에 의한 생식통제법”이라고 비판하면서, <국민우생법>을 계승한 이 법이 보수계 의원과 관료들에게 강력한 지지를 얻은 이유는, 일본으로 귀환하는 길에 소련군, 중국인, 조선인에게 강간당하거나 점령군에 의한 강간 혹은 성매매로 (미군병사의 아이를) 임신한 여성들이 ‘혼혈아’를 낳는 현실에 대한 혐오와 기피가 적잖게 작용했음을 지적하고 있다.[9]

전쟁의 결과로서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을 거절하는 여성들의 바램이 우생학과 인종주의적 차별에 기반한 국가의 재생산권 통제와 길항했던 순간들을 섬세하게 되짚어보는 작업은 ‘전후(戰後)’라는 시간대가  여성들에게는 흐르지 않고 고여있다는 것, 전쟁이 끝나도 여성들의 몸에서 여전히 전쟁은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해준다.

 

<전후 베트남의 산아제한 정책 vs 여성들의 피임링(IUD)거부, 이항대립으로 설명되지 않는 재생산정의>

 

베트남전쟁이 끝난 1975년부터 이십 여년간 베트남의 인구는 두 배로 늘었다. 1980년대 베트남의 산아제한정책은 보건부가 수정란 착상을 막는 자궁 내 피임링 IUD를 공급하고 간호사들이 이를 관리하는 것이 주를 이뤘는데, 이 캠페인을 지지하는 여성들도 있었고, 이에 저항하는 여성들도 있었다.

마을 공동체가 와해되어 남자들이 마을 밖으로 나가 일하게 되면서, 농사를 짓고 돼지를 키우며 육아를 동시에 떠안아야 했고, 남편의 섹스요구에 대해 적극적인 거부의사를 밝히기도 어려워 임신과 출산이 반복되는 고된 날들을 견디던 여성들이 주로 이 캠페인에 호응했다. 피임링은 출혈과 빈혈, 두통을 야기했지만, IUD는 값이 싸다는 이유로 알약과 콘돔 대신 국가가 제공하는 유일한 피임도구였고, 여러 부작용을 겪으면서도 여성들은 벌금제도 때문에 이것을 계속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피임링을 거부하는 여성들도 있었다. 베트남전쟁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북부의 홍강 유역에는 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여성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기존의 도덕규범에 따르면 그들은 재혼을 하지도, 아이를 갖지도 못한다. 베트남 정부의 산아제한정책 또한 이른바 ‘미망인’들에게 아이를 갖지 못하도록 강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마을에서 미망인들이 어떤 식으로든 아이를 키우고 있다. 그들은 남자들에게 돈을 주고 임신이 될 때까지 여러 차례 자신들과 섹스해 줄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나서 아이를 갖게 되면 정부 당국에 벌금을 내는 식이다. 그들은 이런 일에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 전쟁을 겪으면서 이미 충분히 고통받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많은 여성들이 이 일에 동참했기 때문에 이제 그런 일은 폭넓게 용인되고 있다.” [10]

 

<베트남 북부 홍강 유역의 사례를 소개한 책들>

  

전쟁이 끝나고 홀로 살아남은 여성들의 출산을 향한 이러한 의지는 가족공동체 단위로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농촌에서의 생존전략이자 노후에 대한 불안이라는 측면에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해당시기는 ‘미망인’ 뿐 아니라 ’미혼모’의 출산에 대해서도 국가가 벌금을 물리는 정책을 취했는데, 이에 대해서 여성들은 일단 출산을 하고 벌금을 내는 식으로 대처했다.[11]

방글라데시 내전시기의 비랑고나, 귀환과정에서 강간 피해를 당한 일본인 여성들, 국가의 산아제한정책을 지지하거나 거부했던 베트남 여성들의 사례를 통해 ‘전후’라는 시간 속에서도 여성의 몸 그 자체가 재생산정의를 둘러싸고 국가의 통치와 길항하는 또하나의 장(場)이 된다는 것, 그리하여 모든 전쟁은 여성’들’에 대한 전쟁이라는 것을 상기하고 싶었다. 팔레스타인에서, 미얀마에서, 우크라이나에서 그리고 지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들에 대한 무력감에 함몰되지 않고, 이 전쟁들이 여성‘들’에 대한 전쟁이라는 점을, 여성’들’의 몸이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전쟁이 치러지는 치열한 전장(戰場)이라는 점을 놓치지 않고 함께 부여잡고 싶다.


[1] William Drummond, “Raped Bengalis Called Heroes,” New York Post, December. 22. 1971.
[2] Rape victims or war heroes:war women in Bangladesh”, Deutsche Welle(DM) https://www.dw.com/en/rape-victims-or-war-heroes-war-women-in-bangladesh/a-6556207(최종검색일:2021/08/10.)
[3] 수전 브라운 밀러, 박소영 옮김,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남성, 여성 그리고 강간의 역사』, 오월의봄, 2018, 125, 131쪽.
[4] 수전 브라운 밀러, 134쪽
[5] 石濱淳美『太田典礼と避妊リングの行方』彩図社, 2004, pp.8-10.
[6] 패전 후 미군에 의한 점령통치 하에 있던 일본에서 주로 미군 병사를 상대로 성매매를 했던 가창(街娼)을 일컫는 말.
[8] 니시로 루미코 외 지음, 번역공동체 잇다 옮김,  『일본인 ‘위안부’-애국심과 인신매매』, 논형, 2021년, 148-149쪽.
[9] 후지메 유키 지음, 김경자, 윤경원 옮김, 『성의 역사학-근대국가는 성을 어떻게 관리하는가』 ,삼인, 2004년, 341쪽.
[10] 조너선 닐 지음, 정변선 옮김, 『미국의 베트남전쟁』, 책갈피, 2004년, 281쪽. 이 사례가 소개된 마을을 찾아 베트남 현지 답사를 진행했지만, 행정구역이 바뀌어 당시의 마을공동체를 찾을 수 없었고, 당시 IUD 사용실태의 조사를 진행했던 덴마크 인류학자 티네 감멜토프트가 참조한 Pham Van Bich의 저서 내용을 확인하는 것에 그쳤다.
[11] Pham Van Bich, “The Vietnamese Family in Change-The Case of Red River Delta”, Routledge, 1998, pp.75~76, p.190.p
 
이 글은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의 이슈페이퍼와 기사 제휴를 통해 게재되었습니다.(셰어 홈페이지 http://srh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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