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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질환은 신화 또는 은유다!”

신간 [비판정신의학] 추천사 건강미디어l승인2020.10.16l수정2020.10.16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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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전 
한양대학교 의과대학/보건대학원 교수

“아마 언젠가는 정신 장애인이 동일 국가의 다른 시민들과 정확하게 동일한 권리를 가져야만 하고, 근본적으로 그들이 선택하고 결정한 삶을 살 권리를 가져야 함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_주디 챔벌린(Judi Chamberlin)

정신보건의 소사小史와 반성

20여년 전, “만성 정신장애인을 지역사회로 복귀시키고 싶어도 보낼 곳이 없다”는 사실 반, 변명 반의 주장이 몇 십 년째 지속되던 시절, 그 소리 듣는 것이 싫어 경기도 2개 군과 서울시 1개 구의 지역사회 정신보건 시범사업을 진행했다. 그후 경기도 정신보건기술지원단과, 보건복지부 정신보건기술지원단도 조직해 참여했다. 이 활동에 참여한 덕분에 우리나라 모든 시·군·구에 1개 이상의 지역사회정신보건/복지센터가 설치되는 역사에 작은 힘이나마 보탤 수 있었다. 

젊어서 용감했던 당시, ‘국가정신보건체계 모형구축’이라는 거창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고, 오랫동안 번역되지 않고 있던 세계보건기구의 장애인 인권향상지침서를 번역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정신보건 정책영역의 발전은 너무 더디었다. 어렵게 만들어진 센터의 직원들은 열악하고 불안정한 근무조건에서 일해야 했고, 심지어 지역사회 정신보건/복지센터가 오히려 정신병원으로 들어가는 통로 역할을 한다는 비판도 들었다. 

정신보건분야의 더딘 발전에 답답해하며 4-5년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 정신보건문제를 인권의 이슈로 끌어올려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당시 국가인권위원회 안경환 위원장이 세계인권선언 60주년을 앞두고 무엇을 하면 좋겠냐는 말에 나는 기왕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낮은 인권수준으로 고통받고 있는 정신장애인의 인권을 다뤄보자고 제안했고 안 위원장은 흔쾌히 이를 수락했다. 이렇게 시작된 국가인권위원회의 정신장애인 인권 프로젝트는 많은 관련 연구보고서, 심포지엄, 해외전문가 초청세미나, 홍보활동 등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2009년, 『정신장애인 인권보호와 증진을 위한 국가보고서』가 완성되어 나왔다.

이와 함께 국가인권위원회, 국회의원, 몇 명의 의기투합한 전문가들과 함께 「정신보건법」(현재 「정신건강증진 및 정신질환자 복지서비스 지원에 관한 법률」) 개정작업도 진행했다. 당초 응급입원 기간을 넘어선 비자의입원 결정권한을 의료인이 아니라 법원이 맡도록 하는 안을 추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다만, 비자의입원 기준강화, 정신보건시설종사자에 대한 인권교육 의무화 규정만이 살아남았다. 

이후 법무병원 입원자의 인권보장 관련 국가인권위원회 프로젝트 책임자를 맡아 진행하다 보수정권 하 국가인권위원회와의 불화로 그만두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정신보건 영역에서 멀어졌다. 정신보건의 미래에 대한 비관적 인식도 한몫을 했다. 하지만 함께 일했고 여전히 힘든 현장을 지키는 동료들에게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이 늘 마음 한 켠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렇게 서두가 길어진 것은 반성하기 위해서다. 지금 와 다시 생각하니, 정신보건분야 전문가로서 정신보건의 미래를 비관적으로만 보았던 나의 판단은 틀린 것이었다. 그런 나의 성찰과 반성은 다음과 같은 사건에서 비롯됐다.

매드프라이드 행사에서 외치다 “우리가 여기 있다!”

2019년 10월 어느 날, 한 장의 행사 안내문이 눈에 들어왔다. “정신장애인의 당당한 행진 ‘매드프라이드’,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다”는 것이었다. 20여 년 전의 젊은 나도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행사였다. 

2019년 10월 26일, 반가움과 미안함이 뒤섞인 심정으로 국내에서 열린 제1회 매드프라이드 행사에 참석했다. 거기서 오랜만에 이 책의 번역자인 장창현 선생을 만났다. 행진을 앞두고 장선생은 짓궂게 내게 팻말을 들게 했다. 그간의 게으름에 대한 후배의 질책이라 싶어 거절할 수 없었다. 그 팻말을 높이 들고 함께 행진하며 외쳤다. “우리가 여기 있다!” 정신장애를 가진 이들이 대낮에 광화문 차도를 점거하고 행진하며 “우리가 여기 있다”를 외치다니…. 그간 정신보건분야의 발전이 더디다고만 여겼던 내 생각은 핑계일 뿐, 내가 게으르게 머물렀던 동안 현장에서는 매일매일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나는 깊이 반성했다.

내게는 정신보건영역에서 미루어 놓았던 일 또 하나가 있었다. 바로 『비판정신의학』을 한국사회에 소개하는 것이었다. 내가 번역해도 되었지만, 이 책만큼은 우리나라 정신의학분야 전문가가 번역해 주면 좋겠다는 마음에 미뤄왔던 터였다. 그래서 장창현 선생이 번역할 만한 좋은 책을 물어왔을 때, 나는 1초도 지체하지 않고 『비판정신의학』을 번역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데이비드 잉글비(David Ingleby)가 엮은 『비판정신의학: 정신보건의 정치학』(1980)을 제안했다. 장창현선생이 고민 끝에 선택한 책은 샌드라 스타인가드(Sandra Steingard)가 주도해 엮은 바로 이 책이었다. 번역본을 미리 받아 읽어보니 장선생의 선택이 탁월했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이 책은 최근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실천 경험과 제안들까지 담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질환은 신화 또는 은유다!”

이 책은 비판정신의학의 초기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필립 피넬, 존 코널리, 오브리 루이스, 로널드 랭, 아돌프 마이어 등을 언급하고 있지만, 나는 뭐니뭐니해도 “정신질환의 개념은 신화 혹은 은유다”라고 외친 토마스 사스의 ‘천명闡明’을 빼놓고 비판정신의학의 역사를 이야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사스의 그 천명을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이탈리아 전역의 정신과 입원병동을 폐쇄하는 데 성공한 정신과의사이자 정치가 프랑코 바살리아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책은 ‘고발告發’을 담고 있다. 그것은 내부로부터 고발인 까닭에 쉽지 않은 고발이다. 이 책은 현재 정신의학에서 사용하는 질병분류 기준인 DSM-5가 잘못된 ‘생물학적 환원주의’에 기반하며, 의료화를 통해 부적절하게 환자를 양산하고 취약한 인구집단에 대해 위험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으며 이 기준은 타당성뿐만 아니라 진단자 사이 내적 신뢰도도 확보하지 못했다고 고발한다. 한때 노예상태의 흑인이 자꾸 탈출하는 것을 ‘드라페토매니아(drapetomania)’라는 질병으로 명명했던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당연히 이것은 제약회사의 과잉진단과 과대처방과 같은 영리마케팅과 미국 식품의약국FDA을 포함한 제도적 부패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암묵적 편향, 가짜연구 양산, 경제적 이익편취 등 정신과의사들도 이 부패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고발한다. 

비판정신의학에서 ‘비판’은 그것이 ‘열린’ 사고 아래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건설적인 대안을 치열하게 모색한다는 점에서 ‘비난’과 구별된다. 더욱이 이 책은 비판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지침과 대안’을 제시한다. 이 책에서 대안으로 등장하는 ‘계층적 분류체계’, ‘오픈 다이얼로그’, ‘필요기반치료’, ‘약물중심접근’, ‘매드프라이드 운동’, ‘신경다양성’ 같은 개념은 비전문가들에게는 다소 낯설고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전문화한 현대정신의학을 비판하려면 종종 약간의 공부도 필요하다. 마지막 장에 나열된 좋은 치료의 원칙은 정신보건영역의 많은 현장 전문가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나는 이 책이 전문가만을 위해 쓰인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저자들의 설명이 따뜻하고 친절하다. 그렇기에 조금의 인내심을 발휘한다면 이들 개념과 접근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기에 정신과의사, 임상심리사를 포함한 정신보건복지분야 모든 전문가와 학생,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과 그 가족, 누구도 예외 없이, 서로 ‘다른’ 마음과 존재방식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모든 ‘우리’에게 자신 있게 일독을 권한다. 

후기: ‘브롬덴 추장은 무사히 그 골짜기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

어언 20년 전 나는 한 글의 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브롬덴 추장을 언급했다. 1975년 다섯 개 부문의 아카데미상을 휩쓴 캔 캐이시 원작, 밀로스 포먼 감독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 정신병을 가장하여 정신병원으로 들어온 맥머피(잭 니콜슨 분)는 근대 계급사회의 억압구조의 상징인 정신병원의 규칙들과 그 지배체계 하수인의 상징인 수간호사에게 맞선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교화와 치료라는 미명 아래 시행된 전기충격요법이었다. 끝내 정신병원은 현대 의학기술을 동원하여 그의 뇌(腦) 일부를 잘라낸다. 그 정신병원에서 십 년 동안 갇혀 지내 온 아메리카 원주민 브롬덴 추장은 이젠 더 이상 과거의 그가 아닌 친구 맥머피의 얼굴에 베개를 덮어 숨을 끊는다. 그리고 그는 덧문을 부수고 정신병원을 탈출한다. 그의 부족이 살고 있을 골짜기를 찾아가기 위해서다. 그 영화를 다시 떠올릴 때마다 나는 늘 궁금하다. ‘브롬덴 추장은 무사히 그 골짜기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 20년이나 시간이 지났으니, 이제 이 질문에 답할 시간이 되었다. 

나는 극도로 비관적인 현실 속에서 ‘의지적’ 낙관을 선택하고자 한다. 이것은 지난 날 정신보건의 미래에 대해 가졌던 비관적 전망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것이다. 그 낙관이 선택한 이야기의 끝은 이렇다. 브롬덴 추장은 그의 부족이 살고 있는 골짜기로 돌아가는 길에 정직하고, 따뜻하고 겸손하기까지 한 비판정신의학 전문가를 만났다. 

브롬덴 추장은 그와 함께 무사히 그 골짜기에 도착해서 존재 방식의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받고 ‘인지 자유(cognitive liberty)’를 누리며 아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아마 언젠가는 정신장애인이 동일 국가의 다른 시민들과 정확하게 동일한 권리를 가져야만 하고, 근본적으로 그들이 선택하고 결정한 삶을 살 권리를 가져야 함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는 주디 챔벌린(Judi Chamberlin)의 예언이 실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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