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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직업병종합센터 설립까지의 도정

고 박현서 원진직업병관리재단 명예이사장 건강미디어l승인2019.01.30l수정2019.05.29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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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전일본민의련 기관지인 [민의련의료] 1999년 6월호에 게재한 것을 번역한 것으로 『생명의 증언』(요시나카 다케시 지음, 건강미디어협동조합, 2017)에 부록으로 수록되었다.
 
박현서 원진직업병관리재단 명예이사장
 
▲ 2013년 쿄토부보험의협회 방한 당시 원진재단 강당에서 촬영. 가운데 앉은 이가 고 박현서 명예이사장이다.
 
1. 시작하는 말
 
한국에서 직업병이라는 말을 일반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부터였다. 주로 환경성 질병을 일컫는 수은, 카드뮴, 납 등 유해 물질로 인한 질병에 대해서는 외국에서의 사례 보도도 있어, 몇 가지 구체적인 사실도 확인한 바가 있었지만, 노동자들은 자신과 관계있는 산업 재해에 대해선 별로 잘 알지 못했다. 경제 성장 일변도의 군사독재 정권 치하에서는 산재라는 말을 대체로 금기시했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가 만연해 있었다. 
 
본격적으로 산재 직업병에 대한 논의가 발생했던 것은 1988년 여름이었다. 문송면이라는 소년(당시 15세)이 온도계 제조공장에서 2개월가량 일을 하고나서 불면증, 발열, 구토 등의 증상을 호소하면서 공장을 그만두었다.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수은 중독증으로 진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회사와 노동부 지방사무소는 증상의 원인이 산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소년 노동자는 7월에 사망했다. 소년이 사망하자 언론이 사건의 내용을 자세하게 보도하였으며 시민 단체의 운동도 일어나 정부는 산업 안전 위생에 대한 장·단기 대책을 발표하였다. 아직은 불충분했지만, 산재 직업병을 의학적으로나 법적으로 공식 인정하게 된 것이 바로 이때부터였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대규모 산재 인정 투쟁이 각각 다른 곳에서 벌어졌다. 화학섬유 제조업체로 독점 기업체인 원진레이온 주식회사에서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많은 노동자들이 다양한 증상으로 회사를 그만 두었으며, 병원에서 치료를 받거나 혹은 사망했다. 
 
원진은 흥한화섬(주)가 1967년에 개칭한 회사였다. 흥한은 친일파 박흥식이 1959년에 설립한 방적 회사로 소위‘김오히라 메모’로 대한 배상액을 결정하고 나서, 10일 후였던 1962년 12월 20일에 동양레이온(현재의 도레)과 계약한 설비를 도입하였다. 흥한은 1965년 5월 도레의 시가 공장에서 생산 설비를 수입하여 1966년부터 조업을 시작하였다. 
▲ 1925년 토요 레이온 시가 공장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도레가 구조 조정 대상이었던 레이온 생산 설비 철거 방침을 결정한 것은 이미 1961년 8월이었다. 도레의 시가 제1 공장의 시설을 철거하면서 1년 정도 후인 1962년 8월에는 동 제2 공장의 조업 정지를 발표하였다.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해 양국 교섭이 전후 배상액 문제 해결을 위해 ‘무상 원조 3억 달러, 유상 원조 2억 달러, 민간 차관 3억 달러’로 결정하면서 ‘김오히라 메모’의 존재를 확인함에 따라, 한국 정계는 물론 전 국민적 저항을 초래한 것은 이미 유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구체적이 내용을 비밀리에 처리 했던 협상이었다. 
 
도레는 이미 채산이 맞지 않아 폐기하려한 노후 기계를  36억 엔(일부에서는 플랜트 전부를 1,500만 달러 = 54억 엔으로 주장한다.)에 매도하여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이런 막대한 수익이 황화수소와 이황화탄소라는 유독 가스를 대량으로 배출하고 있었던 오래된 기계를 팔아 남긴 것이니 수치이상의 수익이었다. 흥한에서는 이미 설비 도입 2년 전에 41명의 기술자를 일본에 파견하여 도레의 시가 공장에서 반 년 동안 기술 교육을 받았다. 당시 도레는 이미 레이온 제조 과정에서 유독 가스가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이를 한국에 전혀 알려주지 않았다.([VIEW] 1994년 2월 23일 나카무라 고로우中村悟郞 취재·촬영, 고단샤 발행 참조)
 
흥한은 조업 개시 7년 후인 1972년에 부도가 나고 회사명을 ‘세진’으로 변경했으며, 1976년에는 또‘원진레이온 주식회사’로 회사명을 다시 바꾸며 조업을 계속했으나 3년 후에 다시 부도가 나서 산업은행의 관리에 들어갔다. 
 
2. 올림픽 성화 봉송 저지 투쟁(제1차 투쟁)
 
원진에서 최초로 인정 환자가 나타난 것은 1981년 퇴직한 홍원표(97년 사망)가 입원했을 때 판정받은 아황산가스 중독이었다. 그러나 직업병 인정 제도가 제정되기 훨씬 전 일이어서 정확한 진단은 아니었다. 다만 이 조차도 당시 의료계의 상황에서 본다면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대부분의 병·의원에서 진단이 내려질 때 역학적 견해를 반영한 사례가 전혀 없었지만, 국립의료원(한국전쟁 당시 스칸디나비아 국가의 원조로 설립)이었기에 가능했었다. 
 
많은 원진 노동자 들은 다양한 통증에 시달렸으며 퇴직하고 나서 발병하거나 혹은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런 원인이 산재직업병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인식하지는 못했다. 1987년 6월에 전 국민적으로 진행한 항쟁으로 민주화 투쟁의 승리는 직업병 인정 투쟁에도 큰 영향을 초래했다. 우선‘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를 결성했고, 개별적으로 호소했던 수은 중독자 혹은 진폐 환자 등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는 못했다. 그러나 다음해인 1988년 7월에는 다수의 원진 퇴직 노동자들이 인정 투쟁을 시작하였다. 시민 단체에서는 ‘원진직업병대책위원회’를 결성하였고, 퇴직자들은 ‘원진레이온 직업병 피해자 및 가족협의회’(원가협)를 결성하여 인정 투쟁을 극적으로 진행하였다. 
 
오랜 기간 군사독재 정권으로 탄압받은 많은 노동자들은 억압과 탄압에 짓눌려 있던 자신들의 권리를 민주화를 계기로 적극적으로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였으며, 이러한 투쟁은 노동자들에게 많은 자신감을 갖게 했다. 원진 퇴직자 중에는 질병으로 인해 스스로 퇴직했던 사람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병에 걸려 능률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강제 퇴직을 강요당했다. 고통과 질병을 호소하는 퇴직자가 한 사람 두 사람 나타나고 서로 사정을 확인하면서 공통된 증상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방사과에 10년 이상 근무했던 사람 중에는 특정 경향이 아주 강하게 나타났다. 그들은 1986년 말부터 회사를 상대로 직업성 질병임을 지적하면서 교섭을 요구하거나 항의를 반복하였고, 다음해 1월에는 진정서를 청와대에도 보냈다. 건강이 많이 나빠졌던 퇴직 노동자들은 개인 교섭 대신에 집단행동이야말로 성과를 쟁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자각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원가협’은 이렇게 결성한 것이다. 그들은 부인들이나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까지 동행해서 회사 정문 앞에서 항의 농성을 수차례 반복하였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더라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회사나 당국은 전혀 반응이 없었다. 
 
힘들고 괴로운 상태를 감내하면서 그들은 회사가 있던 지역의 야당(평민당,총재 김대중)사무실을 며칠간 점거하며 비참한 사정을 호소했다. 이리하여 야당도 침묵만 할 수는 없어 부총재 박영숙이 회사와 조정을 맡아 협의했으나 좀처럼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전년 3월에 이미 고려대학교 환경의학 연구소에서는 정밀 검사와 작업 환경 측정을 시행하여 그 결과 일부가 알려져 있었으나, 회사나 정부도 대책을 수립하지 않았다. 한편 25개 시민 단체로 구성된‘원진직업병대책위원회’를 결성, ‘직업병 참사 규탄과 독가스 추방 결의대회’를 개최하여 노동자들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약간의 진전도 달성하지 못했다. 직장을 다닐 수 없던 그들은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냈다. 바로 올림픽 성화 봉송을 실력으로 저지하겠다는 것이었다. 
 
1988년 9월은 마침 서울올림픽 개최를 예정하고 있었다. 성화 주자가 원진 회사 정문 앞 큰 도로(경춘 국도)를 지나갈 계획이었다. 이를 알게 된 노동자들은 휠체어나 지팡이에 의지하면서 가족들도 참여하여 대로에서 연좌 농성을 시행하는 계획을 비밀리에 수립하였다. 하지만 비밀 계획마저 누설이 되었고, 당국은 매우 당황해서 그들을 협박하거나 설득하였지만 노동자들은 완강하게 거부했다. 국제적으로 창피한 사건이라 판단한 당국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요구 일부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질병 유소견자에 대한 검진을 처음으로 시행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에서 처음 있었던 조직적인 직업병 인정 투쟁이었으며, 이때 인정을 받은 환자는 35명이었다. 이때의 빛나는 성과를 기반으로 그 다음해인 1989년에는 또 다른 피해자 단체인‘원진레이온 직업병피해노동자협의회“를 결성하였으며, 필사적인 투쟁 끝에 111명이 직업병 피해 환자로 인정받아 위로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다. 
 
3. 137일간 진행했던 장례 투쟁(제2차 투쟁)
 
4년간 방사과에 근무한 후에 고혈압 등의 증상으로 퇴직했던 김봉환은 수년간 입원하거나 통원하면서 치료했으나, 1991년 1월 5일에 갑자기 쓰러졌다. 미망인은 시신을 병원 안치실에 놔둔 채 1개월 남짓 직업병 인정을 받기 위해 회사와 당국에 호소하였으나, 아무런 답변도 듣지 못한 채 3월 초에는 어쩔 수 없이 장례를 치르기로 결정했다. 장례식에는 고인이 평소 인연이 깊었던 장소 즉 원진레이온 회사 구내에서 간단한 노제를 지내기로 하였으나 회사 측은 정문 앞에서 많은 경비를 배치하여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유족과 대책위원회는 긴급회의를 열고 관을 정문 앞에 놔둔 채로 농성에 돌입하기로 결정했다. 
 
▲ 원진레이온 직업병 투쟁 모습
 
3월초의 찬바람이 부는 때였으나, 농성 천막 안에서 유족과 회사 동료들은 교대로 밤을 새웠고, 대책위원회의 멤버와 함께 회사와 노동부를 상대로 직업병 인정을 계속해서 요구하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재야 운동가나 시민 단체 등 후원자의 참가도 늘어 대중 집회를 매일 회사 정문 앞에서 개최하였다. 천막안 고인의 영정에는 꽃다발이 놓이고, 주변 현수막에는 붉은 글씨로 “노동자도 인간이다. 독가스가 웬 말이냐”, “청춘을 바쳤는데 직업병이 웬 말이냐!”, “산재 망국! 회사와 노동부는 각성하라 !”, “예전의 산업 전사, 독가스로 폐기하지 말라 !” 등의 슬로건이 선명하게 걸려 있었다.‘대책위원회’는 8회에 걸쳐 ‘원진직업병 은폐 범국민 규탄 대회’를 개최하였고, 결국 신문의 보도나 방송의 보도 내용도 노동자 쪽에 우호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5월에 들어서자 신문이나 텔레비전 방송의 여론도 들끓어 국회는 실태 조사 소위원회를 구성해서 조사단을 파견하였으며, 국회 노동위원회에서는 노동부 장관이 어쩔 수 없이 직업병 인정을 검토하겠다는 답변을 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1) 퇴직, 현직 노동자에 대한 전반적인 역학 조사를 시행, (2) 노동부는 생산 공정에 대한 특별 감독을 강화하고 작업 환경 개선과 개인 보호 장비를 지급, (3) 공정한 직업병 인정 기준을 제정, (4) 산재 직업병에 대한 종합 대책 수립 등 21개 항목을 노동자 쪽과 정부, 회사 3자가 합의하였다. 동 합의에 의하여 한국에서는 산업의학 전문의 제도가 본격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엄동설한이었던 1월 5일부터 시작했던 장례 투쟁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한 5월 22일에야 끝났다. 장례는 모든 노동자들의 애도 속에 엄숙하게 거행하였다. 참으로 드문 137일간에 이르는 장대한 대투쟁이었다. 장례 투쟁은 1991년 초여름에 발생한 ‘강경대군 폭행 치사 만행 규탄 투쟁’과 함께 민중, 민주 운동이 수행했던 양대 투쟁의 하나였다. 
 
▲ 1991년 원진레이온 노동자 산재 인정을 요구하는 137일 간의 투쟁
“보상금에 눈이 멀어 시신을 그대로 방치해 두다니”하면서 조롱받았던 장례 대책위원회는 물론 미망인은 단호하게 “남편이 직업병으로 쓰러진 것을 확인하는 길만이 고인에 대한 예의이고, 고인의 비극을 다시 다른 노동자들에게 반복해서 발생하는 상황을 절대로 막아야만 한다.”고 초지일관 굳은 결의를 했던 것이다. 
 
김봉환의 직업병 인정에 대한 소송은 1993년 9월 대법원에서 “의학적으로 명시된 인과 관계가 없어도 그에 상응하는 개연적 인과 관계가 있다면 ’직업병‘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판결을 받아냈다. 산재 직업병에 대한 장기적인 혹은 조직적인 지원 체제 강화를 유지하기 위해 장례대책위원회를 발전적으로 해소하였고, 보다 단단한 그리고 항구적인 조직으로서 새롭게 ’원진직업병대책협의회‘를 결성하였다. 
 
▲ 원진레이온 직업병 투쟁 모습
 
4. 원진직업병관리재단의 설립(제3차 투쟁)
 
‘대책협의회’는 ‘원진 노조’와 함께 ‘원진 직업병에 대한 공청회’를 열거나 직업병 인정 기준 개정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업무상 인정 기준의 개정을 위한 가두서명 운동도 시행하여 11만 5,200명의 찬성을 얻어 국회에 청원도 제기하는 등 전면적인 개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1991년 후반부터 1년간에 걸쳐 전개한 일련의 개정 운동을 원진 노동자들은 제3차 투쟁이라고 부른다. 
 
한편 원진 회사의 경영은 그 후 수익성 악화를 초래하였다. 역대 사장은 정권에 충성한 퇴역 장군을 임명했지만, 그들은 경영 합리화는 염두에 없이 골프나 치며 놀러만 다니는 식이었고, 직업병 판정자는 점차 증가해 위로 보상 금액도 늘어만 갔다. 직업병을 양산할 뿐만 아니라, 늘어난 위로 보상금 지불도 많았기 때문에 적자 경영은 심각해져 합리적 대책을 어떻게 세워야 할지 뾰족한 수가 보이질 않았다. 정부는 1993년 7월에 회사를 폐업하기로 결정하였다. 인조견사는 전량 수입하기로 한 것이다. 회사는 정부의 결정이 발표나기 전에 이미 휴업하고 있었다. 
 
원진 노동자들의 제3차(실제적으로는 제4차)투쟁은 회사 폐쇄 조치의 결정을 계기로 일어났음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법적으로 존속할 수 없자, 노동조합은 조직과 기구를 그대로 비상대책위로 변경하고 전원이 사무실에 출근했다. 그들은 우선 폐업 철회를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대책협의회는 비상대책위와 함께 회사의 폐업 후에 직면한 여러 상황을 공격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회사의 존속 기간 내에(1993년 7월까지) 발생한 직업병 인정 환자만 해도 다음과 같았다. 
1987년 9월 고려대 병원 검진 후 판정 35명
1990년 2월 고려대 병원 검진 후 판정 111명
1992년 4월 고려대 병원 검진 후 판정 49명
1992년 4월 서울대 보건대학원 역학 조사 후 판정 43명
1993년 3월 고려대와 경희대 병원 검진 후 판정 22명 합계 260명
 
잠정적인 직업병 인정 제도가 발효한 이후의 5년간에 이미 260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직업병이 발생하여, 향후 회사 폐업 후에도 환자 발생은 계속해서 증가할 것으로 예상할 수밖에 없었다. 중독증의 현실화는 개인차가 있어서 20년이나 지나서 발병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회사가 없어지고 나면 아무리 직업병 환자로 인정받아도 어디서 누가 위로 보상을 해준단 말인가? 전혀 대책이 없었다. 원진 노동자들이 죽고자 투쟁했던 주요한 목표 중의 하나는 현역 노동자의 전원 정밀 검사를 시행하고 판정이 끝날 때까지 10년간 예상할 수 있는 발생 환자에 대한 충분한 위로 보상 기금 확보였다. 또 하나는 현재 근무하고 있는 노동자 전원을 한사람도 빼지 않고 전직을 보장해 주길 원했다.
 
제2차 투쟁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자세로 회사를 추궁했던 원진 노동자들은 서울의 가장 번화한 곳에 있었던 명동성당에서 재야 운동가들과 시민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무기한 농성 투쟁을 지속했다. 정부의 폐업 결정이 있었으나, 회사는 원래도 직업병 인정에 소극적이었으며, 더군다나 회사 폐업을 앞두고 직업병 인정자에게 지급할 위로 보상금을 증액할리는 만무했다. 회사의 폐업을 주도적으로 결정했던 여당의 대책위가 적극적으로 개입한 끝에 회사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부분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노사정 3자 간의 장기간에 걸친 협의 결과, 회사의 폐업 후에도 보상 기금을 관리하고 지급하는 기관으로 원진직업병관리재단을 설립하기로 합의하였다. 재단은 비영리 공익 법인으로서 출자금 50억 원으로 같은 해 11월 23일에 설립 등록 하였다. 
 
재단 설립 후에 직업병을 인정받아 위로 보상금을 수령한 직업병 환자 수는 다음과 같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1999년 4월까지)
 
1994년 11월 경희대병원 검진 후 판정 33명
1995년 1월 회사 폐업으로 인한 전원 검진 후 경희대 병원 판정자 61명
1995년 1월 회사 폐업으로 인한 전원 검진 후 고려대 구로병원 판정자 32명
1995년 1월 회사 폐업으로 인한 전원 검진 후 순천향대 병원 판정자 50명
1996년 5월 경희대와 순천향대 병원 판정 77명
1997년 5월 경희대와 순천향대 병원 판정 58명
1998년 경희대와 순천향대 병원 판정 74명
기타 위에 포함되지 않은 64명
합계 484명
 
재단은 설립부터 현재에 이르기 까지 위로 보상금을 수령할 인정 환자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여 약 100억 원의 기금 증액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충분하다고 할 수 없었다. 얼마나 많은 수의 환자가 발생할 것인지 그로 인해 기금이 얼마나 더 증가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으며, 향후 위로 보상금을 지급하지 못하는 상황이 초래할 수도 있어서 재단으로서는 속이 타 들어갔다. 
 
5. 직업병 종합센터 설립을 위한 투쟁(제4차 투쟁)
 
원진 파산 관리 기구였던 산업은행은 회사의 모든 채무와 채권을 정밀 조사하여 채무 변제에 필요한 소위 동산, 부동산은 남김없이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1994년 4월 21일이었다. 동산이라고 하면 주로 40년간 사용해온 노후 시설과 기계를 지칭했다. 아주 오래된 기계와 시설을 다시 가동하리라는 것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당연히 파산 관리 쪽은 노후 기계를 고철로 매각했던 것이다. 
 
같은 해 8월 제1차 경매에 응찰했던 3개 회사 중에 낙찰을 받은 것은 나전모방이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나전모방은 이것을 고철로 구입한 것이 아니라, 레이온 제조 기계로서 성능을 갖고 있다고 판단하여 다시 매각하였다. 국제입찰 자격이 전혀 없었던 중국 업자와 사전에 협의를 했던 것이다. 
 
기계를 포함하여 모든 시설의 철거 작업은 1995년 10월 시작해서 다음해 1월까지 계속되었다. 나전모방은 우선 기계를 단위별로 분해하고 공장의 창문 위쪽 벽을 제거하여 그곳으로 크레인을 이용해 분해한 기계를 들어 올려 박스 단위로 포장 운반하였다. 분해와 박스 포장 공사가 끝나기 까지 3개월간 50여 명의 중국 노동자들이 공장 내의 기숙사에 머물며 기술을 배웠던 것이다. 
 
원진 노동자들은 산재 직업병의 양산 시설인 기계를 중국에 수출하는 것을 맹렬하게 반대하였다. 그들은 회사 정문에 모여 중국인 노동자를 만나 이 시설이 제조 과정에서 독가스를 배출한다는 사실을 알리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하지 못했다. 고용된 회사 쪽의 많은 경비 인력들이 접근을 엄격하게 제한했기 때문이다. 중국 노동자들은 처음에는 몇 명씩 무리를 지어 출입하였으며, 한국의 안내인을 트럭에 태워 식량 등을 구입하기 위해 외출하기도 하였다. 이랬던 상황이 전면 외출 금지로 변경된 것이다. 
 
분개한 원진 노동자들은 수회에 걸쳐 나전모방 측에 강력하게 항의 했지만, 어떠한 효과도 볼 수 없었다. 또한 주한 중국 대사관에 두 번이나 방문해서 노후 시설의 수입을 중단하라는 문서를 건네려 했으나, 현관에서 막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문서의 내용은 레이온 제조 설비 기계가 다량의 독가스를 배출하여 한국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현재 큰 피해를 입고 있다는 것이었으며, 조금이라도 조업을 하게 되면 안전 보호 장치를 충분하게 준비해야 한다는 등의 취지였다. 그들은 몇 차례의 항의 집회를 명동성당에서 개최하고, 나전모방 측의 비인도적 상거래와 중국 정부의 무지를 규탄했다. 때로는 중국 베이징의 천안문에서 중국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자는 내용도 나왔으나 논의만 하고 끝났다. 한국에서 연락을 받은 일본의 노동운동가가 재일 중국 대사관을 방문하여 취지를 전달하였으나, 이에 대응했던 중국의 서기관은 “충분히 이해하였으나 다만 지방 정부가 추진하는 것이어서 중앙 정부가 어떤 간섭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답변만을 받았다.
 
나전모방은 결국 기계와 시설을 중국 랴오닝성의 단둥시에 있는 모 섬유 회사로 수출했다. 현재도 가동 중이라는 이야기이지만, 이황화탄소 중독 환자를 많이 배출시켰다고 한다. 저주받은 이 기계는 일본의 도레의 노동자들을 고생시킨 끝에, 한국에 상륙하여 셀 수 없을 정도의 직업병 환자를 배출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다시 중국 노동자들을 괴롭히는 이런 비극적인 사건 앞에 헛웃음만 나올 뿐인 것이다. 산재 직업병을 양산하는 폐 기계가 지금 다시 국경을 넘어 일하는 사람들의 건강을 파괴하고 생명을 빼앗고 있는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국제  연대를 다시 한 번 굳게 하여 노동 조건의 개선과 건강권 확보를 위해 서로 손을 잡고 전진해야만 하는 시기일 것이다. 
 
파산 관리인 쪽이 회사의 청산 작업으로 마지막에 처리한 것은 부동산, 즉 부지 매각이었다. 회사 부지는 본사가 있는 도농 공장(경기도 미금시 소재)의 14만 7천 평과 용인 공장(경기도 용인군)의 1만 평이다. 특히 도농 지구는 서울의 동쪽에 있는 근교 도시에서 주택 수요가 큰 곳이다. 1996년 2월 도농 지구 부지 경매에 낙찰 받은 부영건설은 공장의 건물을 철거하고 주거지에 적합한 지목으로 변경 받았다. 철거 작업은 즉각 시행하였으며, 다른 공정도 순조롭게 진행하여 같은 해 여름에는 고층 아파트 단지 건설 공사에 착수했다. 
 
파산 관리인 측이 토지 매각 대금으로 받았던 것은 도농 공장 금액 3,600억 원, 용인공장 약 120억 원, 합계 3,760억 원이었다. 1997년 2월 채무와 채권의 총 정산 결과 파산 관리인 측은 약 1,600억 원의 잉여금이 발생했다. 잉여금은 당연히 국고에 귀속되리는 것을 알고 있었던 원진 노동자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바로 제4차 투쟁을 감행한 것이다. 
 
원진직업병관리재단이 보유한 기금은 1993년 회사가 폐업하고 4개월 후였던 11월 26일 파산 관리인이었던 산업은행에서 출자한 50억 원이었으나, 1년도 안 돼 위로 보상금 지급으로 기금은 바닥을 드러냈다. 다음해 8월 시설 매각 대금으로 2억 원을 추가 수령했으나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던 인정 환자에게 지급해야 할 보상금으로서는 불충분하였다. 기금이 고갈하였기 때문에 대출도 검토했지만 재단의 정관 규정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빠진 것이다. 1995년 7월에는 용인 부지 매각 대금 48억 원을 추가 2차분으로 증자하였고, 다시 1996년 9월에는 도농 공장부지 매각 대금으로 50억 원이 증액된 상태까지 기금은 총액 150억 원에 불과했다. 그러나 780명이 훨씬 넘었던 인정 환자에게 지급해야 할 총 금액은 이 금액을 훨씬 상회했던 것이다. 
 
기금 고갈을 심각하게 우려한 원진 노동자들은 1,600여 억 원의 순이익 발생한 기회를 충분히 활용하고자 하였다. 충분한 기금 확보는 물론 예전부터 소망해왔던 직업병 전문 병원을 이번 기회를 통해 설립하고자 했던 것이다. 재단 설립 당시 재단 측은 파산 관리인과의 합의에 의해 위로 보상금 지급 기금을 충분하게 확보한다는 점 이외에, 직업병 전문 병원의 설립과 운영, 복지시설 확보와 운영, 직업병의 종합적 장기적 대책 방안을 강구하기 위한 직업병 연구소의 설립과 운영 등과 함께 이와 관련한 사항을 관장할 수 있도록 재단의 설립 취지와 목적을 정관에 명문화 해 놓고 있었다. 이번이야말로 재단 설립의 취지와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불요불굴의 원진 노동자들이 다시 한 번 일어선 것이다. 
 
1997년 3월 13일 남녀 합해 약 300명의 노동자들은 무리를 이루어 명동성당에서 모여 출정식을 거행한 후에 농성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민주화 운동의 본거지로서 10여 년간 억압 받아온 민중의 친구이자 휴식처였던 성당에서는 예배와 종교 활동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나가줄 것을 요구하였다. 해마다 민중들의 집회와 농성장으로 기능해왔던 성당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조치일지도 모르겠다. 노동자들은 그날은 그대로 해산하고 다음 날부터 천막을 치고 농성에 돌입하였다. 
 
3월이 되었으나 아직 찬바람이 부는 계절이었다. 중년 부인들은 두터운 담요와 난로를 피워놓고 매일 교대로 농성하고, 남성들은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호소문을 배포하거나 서명을 받으며 투쟁했다. 
 
노동자들의 간부는 산업은행 총재와 면담을 요구하는 한편, 청와대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여당, 국회, 노동부, 신문사 등을 방문하여 그들의 소망을 호소했다. 매일처럼 산업은행 앞의 길거리에서 무리를 이루어 노동자들이 총재와의 면담을 요구하고 교섭에 응해줄 것을 주장하였다. 
 
몇 번에 걸친 교섭이 결렬되었으나 결국에는 4월 23일 밤늦게 교섭을 극적으로 합의할 수 있었다. 합의 내용은 위로 보상금 기금의 추가 지급액으로서 96억 원, 병원 설립 기금으로 110억 원, 합계 206억 원을 출연하기로 한 것이다. 교섭의 양측은 합의문을 교환한 후에 악수를 하였다. 탄식과 분노의 눈물을 흘리면서 투쟁하기 어언 10여년! 직업병 피해 노동자들의 오랜 투쟁은 노동자들의 대승리의 환호성으로 마감했다. 
 
6. 맺음말
 
한국에서는 직업병이라고 말하면 원진을 생각할 만큼 산재 직업병의 대명사인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노동자의 작업 환경 개선 즉 산업재해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고 예방 조치 마련을 위해 원진 노동자들이 고생하며 장기간 투쟁해온 점을 사회가 높이 평가했다는 반증이다. 특히나 원진 노동자들이 산재 직업병 인정을 제도적으로 확립시켰고 구체적인 인정 기준을 설정하는 것에 크게 공헌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인정 기준에 따라 산재 위로 보상금을 지급하는 제도를 확정했다. 
 
사회 안전망(사회보장 제도)을 거의 제도화 하지 못했던 한국의 현실에서 이것이야말로 큰 사회적 공헌이었다. 산재보험 제도가 수년 전에 겨우 만들어졌던 노동부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업계는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하여 시행이 좀처럼 실현되지 않았다. 한국의 사회보장 제도를 본다면 1997년 12월 IMF 사태에 들어서자 고용보험, 실업급여 등의 제도가 시행하였고, 국민연금 제도도 1999년 봄부터 시작한 것에 불과했다. 이런 측면에서 원진 노동자들의 투쟁은 산재 직업병에 대한 여러 제도를 비교적 조기에 정착시킨 계기였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산재 직업병에 대한 투쟁이 원진 노동자들만 진행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태백시를 중심으로 탄광 노동자들의 맹렬한 진폐 인정 투쟁은 원진 투쟁과 함께 한국에서 산재 투쟁의 양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조선소 등의 금속 공업이나 터널 굴착 공사장에서 진폐 문제, 전구 제조 공장 등의 수은 문제, 기타 제조 과정에서 폭로되는 유기용제 등의 문제에 대한 광범위한 투쟁이 있었으나, 대부분 고립 분산적인 투쟁이었기에 여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 성공도 할 수 없었다. 
 
원진직업병관리재단은 원진 투쟁에서 확보한 기금을 산재 직업병 노동자들을 위해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장단기 대책에 따라 각종 사업에 착수한 것이다. 구체적인 사업 내용을 보면 ① 직업병 전문 병원의 설립과 운영, ② 직업병 연구소의 설립과 운영, ③ 직업병 복지관의 설립과 운영 등이다. (이하 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원진복지관의 설립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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