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 2018.12.4 화 13:36

마쓰리가 남겨놓은 마지막 문자 메시지

[어느 과로사] 추천사 건강미디어l승인2018.12.01l수정2018.12.01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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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영 전
한양의대/보건대학원 교수, 예방의학 전문의,
국가생명윤리위원회 위원, 법무부 인권정책자문단 위원

이 책은 특별한 책이다. 분량은 적지만 내용은 묵직하고, 슬프지만 아름답다. 절망적이면서도 희망적이다. 무엇보다, 24살 꽃다운 나이에 너무 일찍 운명을 달리했지만 아주 오래 우리 마음 속에 살아있을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광고회사 ‘덴쓰’의 화려한 네온사인 광고판 뒤에는 일주일 동안 10시간도 못 자면서도 밤늦게까지 회사에 남아 ‘상사에게 꽃다발 증정 방법’까지 연습해야 했던, 그리고 예전에도 상사의 구두에 맥주를 부어 마실 것을 강요당했던 슬픈 청년들이 있었다. 묻힐 뻔했던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자, 완강히 부인하던 가해자들은 어쩔 수 없이 몇 차례나 머리를 조아렸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반성했으리라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없는 것 같다.

더욱 슬픈 것은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는 청춘이 마쓰리로 끝날 것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도처에 있다. 산재사망률 세계 1위를 오랫동안 지키고 있는 한국 사회에도 너무 많은 마쓰리가 있다. 우리는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죽어간 79명 마쓰리도 알고 분노와 고통에 스스로 운명을 달리한 30명의 쌍용자동차 노동자 마쓰리도 안다. 혹자는 이들이 어떻게 같으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예방의학 전문가인 나는 ‘강요된 장시간의 노동’, ‘이해할 수 없는 해고’, ‘작업실에서 뿜어져 나오던 발암 물질’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기어렵다.

도처에 마쓰리가 있다면, 세계 도처에 ‘덴쓰’가 있다. 그들이 보이는 모습은 삼성, 쌍용자동차 등 탐욕적인 기업들이 보이는 모습과 매우 닮아 있다. 그 누구는 “노동자에게 조국이 없다”고 했다지만, 그 말은 “자본가에게는 조국은 없다”라는 말로 수정되어야 한다. 오늘날 자본은 세계 어디에서나 같은 몰골이다. 게다가 이들의 폭력은 더욱 교묘해져 간다. 과거에는 무자비한 노동환경과 폭력이 만연했다면, 요즘은 가해자들이 ‘과로 사회’ 뒤로 교묘히 숨고 있다. 누구는 작금의 자본주의 사회를 ‘자기 착취 사회’라 부른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내가 가난한 이유는, 내가 오늘 연장근무를 해야 하는 이유는 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자책하게 만든다. 그래서 직장에서 힘든 노동을 마치고도 졸린 눈을 비비며 대학원으로, 영어 학원으로 발길을 옮긴다. 파김치가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일은 1시간 더 일찍 출근해서 더 열심히 일해야지’라고 다짐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오늘 내가 과로하고 피곤한 것은 나 때문이 아니다. 또한 내 간 기능이 떨어져서는 더더욱 아니다.

고개를 들어 세상을 돌아보면 이 세상은 엄청난 권력을 가진 대자본과 정치 권력자들과의 담합, 전문가들의 기회주의와 변절, 대중들의 무기력과 무관심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아주 작은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래 이제 더이상 이 세상에 희망을 품지 말고 이만 끝내자”고 마쓰리가 올랐던 계단을 오르려는 순간 갑자기 “땡”하고 문자 메시지 하나가 온다. 마쓰리가 휴대폰으로 보낸 메시지다. 직장 선배가 알려준 문자다. “증거를 잡아 놓아야 된다고 생각해. 플랩 게이트를 통과한 시간은 움직일 수 없는 증거야.”

그녀가 남겨놓은 이 문자 메시지가 없었다면, “그만 포기하라”는 수많은 회유와 모욕을 끝까지 견뎌낸 마쓰리의 어머니 다카하시 유키미 여사의 용기가 없었다면, 풍요로운 삶을 포기하고 늘 억울한 노동자의 편에 섰던 법률가 가와히토 히로시의 의로운 분투가 없었다면, ‘덴쓰’의 열악한 노동 조건과 기만에 공분해 재판장과 SNS를 가득 메운 시민들이 없었다면, 마쓰리의 원혼은 지금 이 시간에도 구천을 떠돌아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제2, 제3의 마쓰리는 오늘도 ‘덴쓰’ 빌딩 옥상으로 가는 계단을 올랐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이 책을 ‘마쓰리의 슬픈 이야기’라고만 할 수 없는 이유이다. 이 책은 마쓰리의 어머니 다카하시 유키미와 노동자의 벗 가와히토 히로시 변호사 그리고 이들과 연대했던 사람들의 열정, 헌신 그리고 무엇보다 승리의 이야기도 담고 있다. 마쓰리가 떠난 지 어언 몇 년이 흘렸다. 우리 사회는 좋아지고 있을까? ‘과로사 없는 사회’는 가능할까? 노동이 착취가 아니라 자신과 타인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그런 ‘다른 세상’은 정말 가능할까? 여전히 세상에는 희망보다 절망이 더 넘쳐나는 듯하다. 아마 다키하시 마쓰리, 다카하시 유키미, 가와히토 히로시도 수없이 절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은 그 질식할 것 같은 비관들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고 그것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그러니 더 이상의 마쓰리가 없는 세상을 꿈꾸는 이들이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우리 모두가 마지막 순간에도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문자 메시지를 보낸 마쓰리의 손가락을 가지는 일이다. 우리 모두가 다카하시 유키미, 가와히토 히로시가 되는 일이다.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마쓰리도 그렇게 생각할 거라 믿는다. 그녀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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