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 2020.2.13 목 20:16

All Okinawa: 작은 저항들

건강미디어l승인2020.02.01l수정2020.02.13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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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지(의사)

오키나와에 다녀왔다. 인의협의 일본 자매단체인 민의련에서는 매년 정기적으로 오키나와에서 역사탐방을 하며 미군 기지 문제, 태평양 전쟁, 오키나와 민중운동에 대해 공부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지는데 단체 선생님들과 함께 일본 팀에 합류해서 2박 3일간 역사 기행을 함께했다. 나는 사실 이번 여행에 큰 기대가 없었다. 연차가 남기도 했고 따뜻한 곳에서 바다나 보고 햇살이나 좀 쬐고 싶다는 안일한 마음으로 떠났는데,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돌이켜보며 참으로 소중한 시간이었구나 느끼고 있다.

1. 오키나와, 일본이면서 일본이 아닌

1879년, 류큐번은 폐지되고 오키나와현이 설치되었다. 메이지 정부가 류큐 처분의 대의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민족통일과 근대화였다. 그러나 류큐와 책봉관계에 있었던 청국이 구미열강에 부여한 통상특권을 일본에게도 인정한다면 사키시마 제도를 줄 수 있다고 제안했다. 사키시마 제도를 주민들까지 한데 묶어 팔아넘기려 했던 이 시도는 결국 흐지부지되었지만, 영토와 국민을 경제적 이익과 맞바꾸려 했던 이 제안은 류큐 처분의 대의명분에 명백하게 위배되는 경제동물적 정책이었다.
<오키나와 이야기>, 아라사키 모리테루, p.50

오키나와는 16세기 초까지 류큐 왕국이라 불리며, 독자적인 문화와 언어를 발전시켜왔다. 명나라와의 조공 무역을 비롯해 일본, 조선 및 동남아 지역과의 중개 무역을 통해 큰 이익을 챙기고, 14~16세기 황금시대라 할 만한 대교역 시대를 걸어왔으나 16세기 포르투갈인이 아시아에 진출하며 교역과 국력이 차츰 쇠퇴해갔다. 1609년, 막부의 허가를 얻은 사츠마 군 3천여 명이 침략한 후, 일본 막부의 속령이 되었고 메이지 유신을 거치며 일본 제국에 편입되었다. 아열대의 온화한 기후와 맑은 바다, 밀림, 독특한 향토 문화와 천혜의 환경을 자랑하는 이 섬은 태평양 전쟁 중에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1945년 3월, 오키나와 섬 주변에 약 1500척의 미군 함대가 집결하고 오키나와 전이 시작된다. 이때 들이닥친 미군은 지상 전투 부대 18만, 해군 부대와 후방 보급 부대까지 합치면 54만 명에 달한다. 1945년 4월 1일, 미군은 오키나와에 상륙했고 오키나와는 태평양 전쟁 중, 일본 영토 중 유일하게 지상전이 일어난 곳이 된다.

 
 
미군이 상륙한 이튿날, 요미탄촌 치비치리 가마에 숨어 있던 주민들이 집단 자결을 결행, 82명이 희생되었다. "살아서 포로의 굴욕을 당하지 말라"는 일본 제국주의의 선전이 민중들 사이에 침투한 결과였다. 반면 일본군 패잔병들은 '만세 돌격'을 감행하여 옥쇄하는 종래의 패턴을 버리고 남쪽으로 달아났다. 그것은 오키나와 전이 '본토 결전'을 위해 최대한 시간을 벌고 '천황제를 지키는' 조건으로 평화 교섭의 길을 모색하기 위한 '사석 작전'이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죄없는 주민을 희생시키는 한이 있어도, 하루라도 더 오래 미군을 오키나와에 붙잡아 둘 필요가 있었다.
<오키나와 이야기>, 아라사키 모리테루, p.66

오키나와 전 당시, 일본에게 있어 오키나와는 철저한 死石(바둑 용어, 사석, 버리는 돌)이었다. 미군과의 교섭을 위해 일본 정부는 시간을 끌기 원했고, 오키나와 인들이야 죽던 말던 신경쓰지 않으며 천황의 영광을 위해 옥 같이 부서질 것(옥쇄)을 강요했으며, 이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그 결과 본토 출신 군인 약 6만 5천 명, 오키나와 출신 군인 약 3만 명, 민간인 9만 4천 명이 희생되었다. 거의 20만 명이 이 작은 섬에서 목숨을 잃은 것이다.

▲ 오키나와 평화기념관에 세워진 평화의 비. 항상 기념관을 찾는 방문객들이 놓아둔 꽃이 가득하다.

종전 이후, 오키나와는 미국의 지배를 받는 미국령이 되었고 공산주의에 대한 방패이자, 동아시아에 지배력을 행사하기 위한 미군의 요새로 쓰이게 된다. 1951년 9월, 오키나와에서는 '평화 헌법' 아래로 복귀, 라는 구호를 내건 일본 복귀 운동이 일어났으나 오키나와 민중의 의사는 묵살당했고, 대일 평화조약 제 3조에 따라 오키나와를 반영구적으로 일본에서 분리하기로 결정한다. 그 결과, 미국은 오키나와에 미군 기지를 자유로이 건설할 수 있게 되었고, 일본 영토의 0.6%에 불과한 오키나와에 전체 주일 미군 기지의 75%가 세워지게 되었다.

1965년 2월, 베트남 전 당시 오키나와는 최전선 기지가 되어 베트남으로 수많은 보급품과 전투기를 보냈다. 30년 가까이 미국령으로 있던 오키나와는 1972년 5월 15일, 일본의 국력이 커지며 일본 정부의 요구와 국민 정서에 따라 다시 일본으로 반환된다. 그러나 여전히 오키나와에서는 미군 군사 기지가 건재하고, 미군에 의한 성추행, 음주 운전 사고, 전투기 추락, 기름 유출, 비행장 주변의 소음 공해, 기지 확장을 위한 간척사업, 동반되는 환경파괴 등 수 많은 문제가 산적하고 있다.​

이번 2박 3일의 탐방동안, 후텐마 기지와 가덴초 군사 기지를 둘러보았다. 거의 하나의 마을에 가까울 정도로 거대한 활주로와 군사 기지가 덩그러니 놓여있고 그 기지를 둘러싸고 빽빽하게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있다. 매일 매일, 전투 훈련을 위해 비행기가 날기에 굉음이 들리고, 도넛츠처럼 마을 한 가운데 존재하는 기지 때문에 현지인들은 가로지르면 금방 갈 거리를 30분 이상씩 돌아가야 한다. 이 모든 피해가 여전히 오키나와라는 작은 섬의 주민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작은 섬의 주민이라는 이유만으로.

2. All Okinawa: 작은 저항들

첫 날은 부조리에 대해 생각했다. 하늘은 푸르고, 바다는 맑고, 날씨는 따뜻하다. 이 작은 섬은 몹시 아름답다. 그러나 이 섬의 곳곳에는 여전히 군사 기지가 존재한다. 우치난쥬(海人, 오키나와 인)의 땅에 타국의 병사들이 자리잡고 비행 훈련과 해상훈련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키나와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 본토에도, 용산에도, 평택에도 우리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미군 기지"에 대해 낯설게, 돌이켜 생각해봐야 한다. 이것은 몹시 부조리하니까. "어째서 미군들이 여기 있는가" 라는, 단순한 질문을 던져보라. 그리고 곰곰 생각해보라. 내가 당신을 불편하게 했다면, 이 글은 성공이다. 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오키나와 인들의 시위에 연대하며 오래 오래 생각날 말들을 많이 채집했다. 잊기 전에 정리해두고자 한다.

1) 계속한다, 포기하지 않는다.

▲ 헤노코 미군 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시위를 기동대가 제압하는 모습

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과 일본 정부의 상호 협력 아래 헤노코 기지가 건설되고 있다. 기지 건설에 반대하며 2072일째 매일같이 하루 세번 시위를 하고 있는데, 이 시위 어딘가 좀 이상하다. 그리고 사랑스럽다. 매일 아침 9시, 12시, 오후 3시에 래미콘이 기지 건설에 쓰일 모래를 운반하기 위해 공사장으로 들어온다. 그 공사장 앞을 점거하고, 주민들이 앉아서 "기지 건설 절대 반대", "주민 의견 묵살 말라", "민의를 무시하지 마라" 외치며 노래도 부르고, 구호도 외치고 있다. 공사장 앞 게이트를 이렇게 점거함으로써 래미콘과 트럭들은 진입하지 못하고, 그 날의 공사는 시작되지 못한다. 그러나 곧 기동대가 와서, "도로교통법 상 이런 점거는 불법이다, 마지막 경고니 그만 해산하라" 말한다. 기동대는 경고 후, 도로에 앉거나 누워서 자리를 지키는 어르신들을 무력으로 끌고 나가고 (한국과 다르게, 꽤 정중하게 어르신들을 들어 이동시켜서 놀랬다.) 공사장 게이트는 다시 열리며, 건축 자재를 실은 트럭들은 속속 게이트를 넘어간다. 실제로, 9시부터 게이트를 점거하고 있었지만 9시 50분쯤에는 모든 상황이 종료되어 게이트는 열렸다. 이런 일이 공사트럭이 들어오는 타임에 맞추어 하루 3번씩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 2072일째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시위대가 공사를 지연시킨 시간은 고작 30~40분 정도이다. 게이트는 다시 열리고, 공사는 다시 진행된다. 그러나 계속 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공사를 지연시키기 위해. 또한, "우리가 여기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세나가 카즈오라는 존경스러웠던 지역 활동가께서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렇게 계속합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 활동은 의미 없어 보이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게이트를 점거하더라도 곧 다시 기동대에 의해서 시위자들은 옮겨지고, 게이트는 열릴테지만 여기서 주민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걸 꾸준하고도 성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의미없지 않습니다." 우공이산이라는 사자성어가 이런거구나 싶었다. 그들은 산을 옮기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꾸준하고도 성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의지와 존엄을. 그러니, 기억해야 하리라. 계속 할 것. 포기 하지 않을 것.

▲ 헤노코 미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집회가 매일 하루 세 번 공사 게이트 앞에서 열리고 있다.

2) 작은 저항들

① 몸으로 배운 것.

이번 탐방 때 나는 단체의 인솔자인 지역 활동가 세나가 카즈오 상에게 반해버리고 말았다. 이 오키나와 인은 모든 걸 알고 있다. 미군기지 건설에 쓰이는 예산, 하루에 게이트 경비 용역을 고용하는데 일본 정부가 쓰고 있는 비용, 미군의 비행훈련 시 최소한으로 지켜야 할 비행 고도 등등, 군사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지역운동을 꾸려가며 그는 모든 법 조항, 수치, 비용, 예산에 정통해있었고 이 '근거'들이 곧 일본 방위국과 미군 부대에 대항해 싸우는 발판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설명을 들으며 그 "근거"들은 결코 하루아침에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지역 운동에 몸담은 세월과 경험으로 얻은 것들이라고 느꼈다. 몸으로 배운 것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미군도 두려워한 사나이"로 불렸던 세나가 카메지로이다. 오키나와 토박이로, 1972년까지 이어진 미 점령기 때, 자주 독립 운동의 선봉에 썼었다.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며 자신이 나고 자란 땅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치고, 그 정신을 계속 이어나가는 것을 보며 존경을 느꼈다. 송게시마스 (존경합니다.)

② 로컬의 힘

로컬의 힘이랄까, 대중의 힘에 대해 또한 생각하게 되었는데, 헤노코 기지의 게이트를 점거하면서 지역 주민들은 매일 매일 그 공사장 안으로 들어가는 트럭의 수와 기종, 래미콘의 수들을 체크하고 있었다. 그 수치를 바탕으로 기지 건설이 얼마만큼 진행되고 있는지, 공사가 어느 단계를 거치고 있는지 유추하며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나 혼자라면 못했을 일을 여러 사람들이 모이면 해낸다. "아, 저 공사기구는 공사 진행의 어느 단계에 쓰이는 것이다."라거나, "저 모래를 쓴다는 건 기지 안의 땅이 어떤 조성을 가진다는 뜻이다." 라는 식으로, 머리와 머리를 맞대고 서로 유추해 나가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이 '지역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 이웃이라는 단어를 낯설게 여기는 나와는 다르게, 이 동네 주민들은 서로를 잘 알고, 의지하며, 함께 투쟁한다. 지역 공동체, 함께하는 로컬의 힘을 느꼈다. 도시에서 우리는 너무 원자화되어있다.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멋진 단어를 초등학교에서 배웠던 기억이 난다. 뿌리를 내려 함께 자라야 할 것이다.

③ 작고도 소중한 저항들.

게이트 앞에서의 시위뿐만 아니라 지난 시간 오키나와에서는 작은 저항들이 아름답게 이어져왔다. 반전 지주라고 하여, 자신의 땅을 기지 건설에 내줄 수 없다고 주장하며, 일본 정부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땅을 팔지 않은 지주들이 있었다.

반전 지주란 오키나와가 일본에 복귀할 때 더 이상 자신들의 토지를 전쟁을 위해 쓰게 할 수 없다며 일본 정부와 군용지 임대차 계약을 거부한 이들을 말한다. 복귀 당시 반전 지주는 전체 군용지 지주의 10%가 넘는 3천 명 정도였다. (...) 정부는 반전 지주의 토지까지 강제로 사용하는 한편, 반전 지주를 근절하기 위해 경제적 차별뿐만 아니라 갖은 해코지를 마다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계약 지주에게는 보란 듯이 협력 사례금 명목으로 돈을 더 얹어 지급했다. 또 기지와 관련된 기업에 근무하는 반전 지주의 직장에 일부러 찾아가 계약을 하지 않으면 직장에 계속 다니기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이 때문에 반전 지주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오키나와 이야기>, 아라사키 모리테루, p.116

정부는 그들의 회사에 그들의 '반항'을 고지하고, 인사상의 불이익을 주며 권력을 이용해 억압해왔다. 하지만 1977년까지도 끝까지 자신의 땅을 군용지로 내주지 않은 반전 지주가 300명 가까이 남아 있었고, 이런 그들의 투쟁을 응원하기 위해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1평 반전 지주 운동'을 함께했다. 시민들의 성금으로 군용지 예상 지역을 1평이라도 사 둔 후, 기지 건설에 쓰이지 않도록 막는 것이다. 부동산 알박기와 같은 방법이지만, 그 목적에 있어서 완전 반대다. 경제적 불이익을 무릅쓰고도, 무언가를 지키는 것이다. 뭔가 더 높은 것, 존엄에 관련된 것을 지키며 의지를 이어 나가는 것이다. 작고도 소중한 저항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되고 있다. 젊은이들이 카누를 타고 해군 기지 건설 예정인 해상에서 노를 저으며 나아간다. 보여주는 것이다. 당신들 마음대로 하게 두지 않을 거라고.

3) 맥에서 맥으로

'이야기 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지. 뚜렷한 서사 구조와 기막힌 클라이막스, 그 후의 여운이 함께하는 이야기 같은 이야기. 너무나도 이야기 같은 이야기를 들은 것인데, 오키나와 민의련의 치과의사 선생님으로부터다. 그 분의 할아버지는 슈리성의 기술자였다고 한다. 공습 때, 슈리성이 함락당하던 순간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함께 도망치던 중, 할아버지는 죽고 할머니는 살아남았다. 그 때 마침, 아버지가 할머니 뱃속에 있었고, 그 덕분에 자신도 이렇게 태어났다고. 인생에서 힘든 순간이 오면 슈리성을 방문해서 '나의 역사가 여기서 시작되었다.'고 되뇌이고 온다고 하셨다. 맥에서 맥으로, 피에서 피로 이어지는 자신의 역사를 생각해본다고.

헤노코 기지 시위에서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주로 어르신들이 게이트를 지키며 앉아있고, 젊은 기동대 녀석들이 어르신들을 게이트에서 옮기기 위해 매일 출동한다. "기동대의 젊은이들도 결국 오키나와 인이고 이웃일텐데, 시위대와 기동대가 안면이 있는 경우도 있나요?"라고 내가 묻자, 지역 활동가께서 인상적인 답변을 주셨다.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내 중학교 동창의 아들이 기동대에 있기도 했어요. 시위하는 어르신 중에 전직 교사로 일했던 분도 계신데, 자신이 가르쳤던 학생이 기동대에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쪽에 꽤 냉정한 편이에요. 그 젊은이들이 나쁜게 아니라, 그런 지시를 내린 일본 방위국과 정부가 나쁜 겁니다. 그 젊은이들을 탓하지 않아요." 아이야, 너는 너의 일을 하렴이라고 홀홀 웃으며, 오늘도 매일매일 게이트를 지키는 어르신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찡해진다.

3. 평화, 반전, 반핵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여기 하나의 동굴이있다. 아열대의 작은 섬. 1945년, 때는 봄. 고요하고 평화로운 섬에 갑자기 비행기가 날고 폭탄이 떨어진다. 주민들은 동굴로 대피한다. 동굴은 암흑 그 자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호롱불을 켜고, 두려움에 떨며 옹기종기 모여있다. 아이가 운다. 여기 사람이 있다는 걸 들켜서는 안 된다. 아이를 죽여라, 라고 어제까지 마을의 이웃이었던 이들이 말한다. 발버둥치지만 아이를 뺏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본토에서 온 일본군이 동굴로 들어온다. 미군이 해안가에서부터 올라오고 있다며 이 동굴에 숨어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동굴의 가장 안전하고 깊은 곳을 일본군이 차지한다. 오키나와인은 동굴입구의 경계부로 밀려난다. 산 사람은 살아야하기에 동굴 속에서 밥을 해먹을 석쇠를 만들고, 부상당한 이들을 눕힐 자리도 만들고, 습기에 젖지 않게 텐트도 친다. 그렇게 동굴 속에서 전쟁이 끝나길 기다린다. 춥고, 어둡고, 습한 깊은 절망 속에서.

장소 이동. 여기는 동굴 밖. 동굴에도 들어가지 못한 이들이 있다. 1만여 명 이상의 조선인과 1000명 가까운 일본군 성노예 여성들은 이 전쟁 기간 동안 전쟁을 피해 동굴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한국인, 중국인, 필리핀인 등 일본의 식민정책에 의해 오키나와로 끌려왔던 이들은 철저히 배제되었고, 그들이 맞이해야 했던 것은 끝없는 바다였다. 끝없는, 끝없는 바다와 사탕수수밭.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미군. 동굴 속으로 들어갈수도, 숨을 곳도 없는 남쪽 끝의 바다. 세상의 끝은 멀리 있지 않다.

▲ 오키나와 전에서 희생된 한국인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으로 국가가 구분된 채 각명되고 있다.

다시, 장소 이동. 21세기 서울의 겨울. 햇살은 맑고, 날씨는 포근하다. 조용한 방에서 '전쟁'과 '평화'라는 두 단어를 생각하고 있다. 나는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다. 겪어보지 않은 이가 '평화를 바란다'고 외치는 것은 너무 나이브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평화를 바라는 작은 마음들 역시 '저항의 한 형태'라고 생각한다. 지난 시간, 전쟁은 권력층들의 이익관계에 의해 일어났었다. 희생당한 이들은 물론, 권력의 밖에 있는 이들이었다. 20세기의 일이라고 여길 수 없다. 지금도 여전히 전쟁의 '가능성'을 품은 군사기지들이 곳곳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있으니까. 그러니, 저항하자. 모든 전쟁에. 오키나와를, 제주를, 카불을, 사이공을 기억하며 작은 마음들을, 작은 저항들을 지켜나가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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