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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의 첫 세대를 살다 가신 이태준 선배님께 드립니다

건강미디어l승인2019.04.13l수정2019.06.29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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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건강보험공단 김용익 이사장이 의사이며 독립운동가였던 대암 이태준 선생님께 올리는 편지 형식의 글입니다. (편집자 주)

의사(醫師)이며 의사(義士)였고, 한국과 몽골을 사랑했던 선구자 이태준 선배님께

100년도 넘는 일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한계는 60년 전 쯤의 일들입니다. 선배님께서 살다 가신 시절은 그의 두 배입니다. 저의 선친께서 1910년 경술 생이시니 그때 선배님께서는 이미 세브란스병원 의학교를 3학년으로 다니고 계셨습니다. 그래도 아버지와 제가 모두 의사라는 공통점으로 선배님이 그리 멀리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시골의사 생활을 하셨던 아버지의 기억에서 선배님의 모습을 조금은 짐작해 보기도 합니다.

1883년 선배님이 태어나셨다는 경상남도 끝자락 함안의 그때 모습이 어떠했을지는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가난했겠지요. 그러나 제가 기억하는 60년대 전후의 가난보다 더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일제의 수탈과 6.25전쟁의 파괴를 겪기 이전이었으니까요. 그러나 그 때 조선은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7년 전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을 한 다음, 무능하고 무례한 청나라와 야욕에 가득한 일본 사이에서 독자적인 개혁을 할 수 있을지 갈림길에 서 있던 시기였습니다.

총명한 아들이었던 선배님을 서당에 보내 공부를 시켜 주셨던 부모님을 열다섯, 열여섯에 알 수 없는 병으로 연거푸 잃고 스무 살에 얻는 부인마저 3년 후 둘째 아이를 낳다가 돌아가시는 불행을 연이어 겪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시절 우리 백성들의 건강 상태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불행은 행운을 낳고 행운이 불행을 낳기도 합니다.

그 즈음 다니게 된 교회의 서양인 목사님이 홀로 된 선배님을 서울로 보내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해 주셨습니다. 함안에서 배를 타고 부산에 가서 삼랑진역에서 경부선 기차를 타셨을 것이라고 합니다. 1906년의 그 시절에 기차를 타고 서울에 간다는 것은 다시는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다는 뜻일 수도 있었겠지요. 결국은 그리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취직하게 된 ‘김형제 상회’가 세브란스 병원 앞에 있었고, 그 ‘김형제’ 중의 한 명이 세브란스 의학생이자 얼마 후 제1기 졸업생이 될 김필순 선생이었습니다. 선배님께는 운명의 도약을 만들어 낸 연결고리였을 것입니다.

이런 우연으로 시골 청년의 상경은 서울로 올라오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게 되었습니다. 김필순 선생은 선각자이자 애국자였고 도산 안창호 선생의 친구이자 동지였고 그레이(Gray)의 해부학 교과서를 -저 역시 이 책으로 해부학을 공부했습니다- 번역하는 뛰어난 신진 의학자이기도 했으니 선배님께는 다시 없을 인생의 지도자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안창호 선생 또한 선배님께 큰 영향을 주셨겠지요.

김필순 선생의 권유로 선배님은 의학생이 되었고 4년 후 ‘무사히’ 졸업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1907년부터 1911년의 사이의 4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일을 4년간 ‘무사히’ 꾸준히 할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독자적 개화에 실패한 조선은 결국 1910년 패망했습니다. 이를 겪어야 했을 선배님들의 분노와 슬픔을 지금의 후손들은 차마 짐작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병탄 다음 해에도 일제는 총독 테라우치의 암살 기획 사건을 조작하여 저항세력을 분쇄하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이른바 ‘105인 사건’입니다. 일제는 두 분도 이 사건에 엮어 넣으려 했습니다. 정보를 얻은 김필순 선생은 1911년 12월 31일 새벽에, 선배님은 그날 낮에 황급히 중국으로 망명해야 했습니다. 이것으로 두 분은 조국에 다시는 돌아올 수 없었고 또 영원히 서로 헤어져야 했습니다. 국권을 잃고 몇달 되지 않아 조국 땅을 탈출해야 하는 심정이 오죽이나 했을까요?

김필순 선생의 소식을 알 수 없었던 선배님은 난징에 가서 그를 찾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김필순 선생은 서간도로 피신하여 퉁화에서 병원을 세우고 독립군을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후에 북만주의 치치하얼로 옮겨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일본군에 독살되었다고 합니다.

난징에서 살게 된 선배님도 병원을 운영하시게 되었습니다. 난징에서의 3년(1912~1914)간은 선배님에게나 독립운동가들에게나 중요한 시기였을 것입니다. 중국은 1911년 10월 10일 신해혁명으로 청조를 무너뜨리고 다음 해 초 중화민국을 건국하여 난징을 수도로 삼았습니다. 그러니 선배님이 계시던 시기의 난징은 혁명의 열기가 가득했고 조선으로부터 온 독립운동가들도 많이 모여들던 곳이었습니다. 선배님은 이들과 교류하고 지원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독립의 열망 하나로 남의 나라 땅을 떠도는 혁명가들에게 ‘돈을 버는 의사’인 선배님이 얼마나 큰 의지가 되었을지 불문가지라 하겠습니다.

1914년에 선배님께는 또 한 번의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우사 김규식 선생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김규식 선생은 선배님보다 두 살밖에 많지 않은 33살이었지만 이미 독립운동의 큰 지도자 중 한 분이셨습니다. 그는 몽골에 군사학교를 만들고 군대를 양성할 계획을 가지고 선배님과 여러 청년들을 규합하여 몽골의 후레(지금의 울란바토로)로 갔습니다.

군사학교를 세우겠다는 계획을 성사시키지 못하고 김규식 선생은 중국으로 되돌아갔지만 선배님은 몽골에 남기로 하셨습니다. 너무나 비참한 질병에 시달리는 몽골인 들을 보고 차마 되돌아갈 수가 없으셨겠지요. 거기서 ‘동의의국(同義醫局)’이라는 병원을 차리고 진료를 시작하셨습니다.

당시 몽골인들에게 널리 퍼진 매독 때문에 수없이 죽어 가던 환자들을 선배님이 살바르산으로 치료하셨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살바르산(Salvarsan)은 파울 에를리히가 개발한 세계 최초의 화학요법제로 훽스트(Hoechst) 사가 1910년부터 시판한 것입니다. 마탄(魔彈, magic bullet)이라고 불릴 정도로 특효가 있었지만 다루기가 아주 까다롭고 치명적인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약이었습니다. 독일에서 시판된 지 4년밖에 안 되는 새로운 약을 선배님은 익숙하게 다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몽골에 병이 어찌 매독만 있었겠습니까? 병원 앞에 줄을 서는 그 많은 환자들을 얼마나 출중한 실력으로 치료해 주셨으면 ‘신의(神醫)’로 불렸다는 전설까지 남아 있게 되었을까요? 선배님은 어려서부터 글씨 잘 쓴다는 칭찬을 들었다지요. 도산 선생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가히 명필이라 할 만합니다. 손이 예민한 사람은 수술도 잘 하는 법입니다. 수술 실력 또한 뛰어나셨을 것이라 짐작을 해봅니다.

몽골 사람들이 선배님을 ‘부처 의사’로 숭상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심상하게 듣고 지나갈 수도 있겠지만 당시의 몽골인들에게 부처님은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몽골은 모든 국민이 깊은 신앙심을 가진 불교도였고 티베트와 쌍벽을 이루는 라마불교의 본거지였습니다. 환자들을 얼마나 자비롭게 대하셨으면 그들이 선배님을 생불(生佛)로 모셨겠습니까?

몽골의 마지막 왕인 보그드 칸(Bogd Khan)이 선배님을 어의로 삼고 외국인에게 줄 수 있는 최고 훈장을 수여했다는 사실에서 선배님의 위상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선배님의 병원은 단순한 병원이 아니었습니다. 러시아와 중국을 오가는 독립운동가들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습니다. 선배님은 그들에게 거처를 주고, 자금을 대고, 병에 걸린 혁명가들을 치료하고 요양시켜 주기도 하셨습니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 1919년의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은 동의의국의 위치를 더욱 중요하게 만들었습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전 세계에 큰 자극을 주었고 한국의 독립운동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18년에는 이동휘가 중심이 되어 하바롭스크에서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이 구성되었고 선배님도 입당을 하게 되셨습니다. 러시아를 오가던 한인사회당원들에게 선배님의 동의의원은 중요한 거점이 되어 주었습니다.

1919년 3월 1일부터 조국의 전역에서 만세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3.1운동입니다. 이 소식을 선배님은 천만리 머나먼 몽골에서 들으셔야 했습니다. 같이 못하는 그 심정이 어땠을까요? 그러나 선배님은 누구보다도 뜨겁게 독립을 위해 헌신해 오신 분입니다. 상하이에 수립된 임시정부는 선배님을 몽골 주재 군의관으로 임명하여 선배님도 임정에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을 정리하기 위한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하는 김규식 선생에게 몇 채 집값에 달하는 여비를 지원하기도 하셨습니다.

1919년 한인사회당은 코민테른에 대표를 보냈고 다음 해 레닌은 200만 루블의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지금의 500~600백억 원을 넘는 거금이었다고 하니 독립운동의 판세를 바꿀만한 큰 기회였습니다. 40만 루블 어치의 금괴 300킬로그램이 시베리아 철도로 도착했습니다. 이동휘의 측근이었던 김립이 그 중 90킬로그램을 가지고 선배님께 왔다지요? 얼마나 흥분되는 순간이었을까요? 선배님과 김립은 금괴의 1/3은 집에 묻어 두고 나머지를 상하이로 운반했습니다. 이동휘는 상하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선배님은 또 하나의 중요한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이었습니다. 무력투쟁으로 조국 광복을 하겠다는 의열단에 선배님도 가입했습니다. 그리고 동의의국에서 같이 지내던 헝가리의 혁명가이자 폭약전문가인 마자르를 의열단에 보내 주기로 하셨습니다. 마자르의 이야기는 최근에 만들어진 영화 ‘밀정’에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선배님은 몽골에 돌아가 마당에 묻어 두었던 나머지 금괴를 말에 싣고 마자르와 같이 중국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이때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불행이 닥쳤습니다. 몽골에 들어와 있던 러시아의 백군 운게르의 부대에 잡힌 것입니다. 그들은 마자르만 풀어주고 선배님은 처형했습니다. 백군을 지원하던 일본의 개입이 있었다고도 합니다.

아! 이렇게 꿈은 끝났습니다.

한국 의료의 선구자이자 누구보다도 훌륭한 의사로서, 또한 자기 위치에서 할 일을 찾고 위험을 조금도 회피하지 않았던 용감한 독립운동가로서, 헌신적이고 혁명적인 삶을 사신 선배님은 그렇게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삶은 오랫동안 잊히고 말았습니다. 선배님을 찾아 대통령 표창이라도 드린 것이 해방 35년이나 지난 1980년이었고 건국훈장을 수여한 것이 1990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선배님의 삶은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다. 대암 이태준 선생을 기록한 책이 나오고 울란바토르에는 기념공원이 생기고 기념관도 건립되었습니다. 저도 이 편지를 쓰면서 선배님의 맑고 깨끗하고 의로운 삶을 더 이해하게 되고 깊이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후배 의사들에게, 또 후배 정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 귀감을 삼도록 해야겠습니다.

선배님의 뜻을 같이 했던 임시정부가 해방을 준비하면서 1941년 11월 28일 공포한 ‘대한민국 건국강령’의 ‘제3장 건국’ 편에 이런 조항이 있습니다.

工人과 農人의 免費醫療를 普施하여 疾病消滅과 健康保障을 勵行함.
노동자와 농민의 무상의료를 널리 실시하여 질병퇴치와 건강보장을 힘써 행한다.

선배님이 되찾아 주신 조국에는 건국강령의 지침대로 이제 건강보험이 있습니다.

선배님, 지금도 수많은 한국의 의사들이 몽골에 가서 의료봉사 활동을 하고 병원을 지어주고 의학교육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몽골의 국민들도 의사들도 한국에 대해 또 한국의 의학에 대해 큰 호감과 신뢰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배님의 역사가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겠지요?

저도 다음 번 몽골에 가면 선배님의 묘소를 꼭 찾아뵙고 큰절을 올리겠습니다. 그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2019년 3월 15일

김용익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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