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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중과 배려로 빛나던 형을 그리며

[세상의 배경이 된 의사] 추천사 건강미디어l승인2018.12.12l수정2019.01.31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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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 문

정신보건연구회 후배
서울시 공공보건의료재단 대표이사


살면서 가끔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고 만나서 웃으며 얘기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러나 막상 만나고 나면 괜히 공허해지고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님을 확인하고 우리는 헤어진다. 그러나 그리운 사람은 그렇지 않다. 다시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채워지지 못하는 갈증이 우리를 허기지게 한다. 배기영 형에 대한 내 마음이 그렇다.

1992년 4월 정신과 학회에서 정신보건법 문제로 우리는 처음 만났다. 당시 보건사회부현재의 보건복지부가 밀어붙이던 정신보건법의 내용이 정신질환자들의 치료와 재활과는 거리가 먼 악법이어서 그것을 저지하는 토론회에 참석한 후 몇 명의 정신과 의사들이 모였다. 내가 제일 어렸고, 김병후 형김병후 정신과의원, 정영기 형아주대 교수 그리고 배기영 형이 함께 있었다. 30대 초반부터 후반까지 혈기 왕성한 정신과 의사들이 의기투합했다. 정신보건법을 연구하는 공부 모임을 하자는데 모두 동의하고 다음 달부터 모임을 시작했다.

이른바 전설적인(?) 한국정신보건연구회의 서막이 열린 순간이었다. 당시 연희동에 있던 김병후 신경정신과의원에서 우리는 매주 월요일 저녁 일곱 시에 모였다. 외국의 정신보건에 대한 공부, 외부 인사 초청, 세미나 개최 등을 겁도 없이 진행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정신보건을 공부하기 위해 우리 모임에 참석했다. 지금은 아무 일도 없는 듯이 무심하게 각자 살아가고 있지만, 그 때 우리는 젊었고 열정에 가득 찼었다.

배기영 형과는 매주 만나 공부하고 9시 이후에는 맥주잔을 앞에 놓고 뒤풀이를 즐겼다. 열띤 토론 속에서도 늘 형은 조용하게 이야기했다. 온화한 미소와 부드러운 목소리, 그리고 유머 치는 형을 우리는 모두 좋아했다. 형의 가장 큰 장점은 존중과 배려였다. 아홉 살 어린 나에게도 함부로 하지 않으시고 늘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해주셨다. 그렇게 100번이 넘는 월요일이 지나갔다. 우리는 정신보건연구회를 통해 최소한 100번의 회의와 100잔 이상의 맥주를 마신 것이었다.

먼 훗날, 정신보건법이 제정되고 우리 모임이 한국정신사회재활협회로 흡수 통합이 된 뒤에도 우리는 따로 만났다. 일부러 약속을 안 해도 사회적 현안이 있는 자리에는 늘 우리 두 사람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형이 혼자 가기 싫으니까 나를 슬쩍 끼워 넣으신 배경이 있었다.

2001년 가을에 미국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뒤 형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당시 의약분업의 격랑 속에 인의협에 정신과 의사가 몇 명 남지 않게 되었는데 내가 그 중 한 명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우리는 크게 웃었고, 바로 그날 환자 의뢰를 하셨다. 골치 아픈 시국 사건으로 대학병원 진단서가 필요한 환자였고, 그 동안 동교신경정신과의원의 진료 기록을 바탕으로 진단서를 작성해 드렸다. 이런 일은 내가 아주대학병원 진료를 그만둘 때까지 일 년에 수차례 있었다. 걸려오는 형의 전화는 반이 진료 의뢰, 반이 특별한 모임에 대한 자문 추천이었다.

2003년 10월의 가을날, 강금실 법무부장관이 추진하던 사회보호법 폐지를 앞두고, 치료감호 문제에 대한 소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역시나 그 모임에 형이 계셨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을형은 이미 다 알고 계신 것으로 보아, 또 나를 끼워 넣으신 것이었다. 대학교수 한 명 정도는 있어야 모임이 잘되는 것 아니냐고 너스레를 떠시던 형의 순진무구한 얼굴이 스치고 지나간다. 그립다는 것은 아마도 이런 마음일 것이다. 회의 후 여유가 있는 날이면 이어지던 뒤풀이 자리에 우리는 함께 있었다.

어느 날 취기가 오른 형이 2차를 가자고 했다. 그것도 ‘여자들이 있는 멋있는 술집’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10여 년이 넘게 우리는 생맥주집과 삼겹살집 이상을 벗어난 적이 없었기에 대체 어디로 가자는 것인지 가늠이 안 되는 순간, 서초동 형의 아파트 앞에 택시가 멈췄다. 한바탕 웃으며, 형수님과 두 딸이 기다리고 있는 ‘세 여자가 있는 술집(?)’으로 가서 우리는 즐겁게 한잔 더 하고 헤어졌다. 사람 좋은 형과 더불어, 익숙한 듯 나를 맞아주시던 형수님의 그날 모습이 눈에 선하다. 여전히

형이 그리운 이유다. 2002년 민주화운동 관련 장애판정 분과에서도 우리는 함께 있었고, 2009년에 인권의학연구소가 발족한 뒤에도 함께 일했다. 함세웅 신부님, 이석태 변호사님(현 헌법재판관), 박원순 이사님(현 서울시장), 최영애 이사(현 국가인권위원장), 이화영 이사현 인권의학연구소장 등이 당시 함께 회의하던 멤버들이다.

2013년 1월 국립공주병원장으로 충청도로 내려가게 되면서 형과의 만남이 뜸해졌다. 서울에서 하던 모임에 내가 나갈 수 없게 되었고, 형도 연락이 드물어졌다. 아마도 형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그 해 가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함께 회의를 마치고, 오랜만에 저녁을 먹었다. 헤어지려는데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서초동 형의 집 근처였고 편의점으로 우리는 들어갔다. 내가 우산을 두 개 샀고, 하나를 형에게 내밀었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내 양복 주머니에 형이 손을 쑥 밀어 넣으셨다. 10만 원짜리 수표였다. 한사코 안 받으려는 나에게 우산 값이라고 우기시며 예전에 빌린 것 돌려준다는 농담과 함께 특유의 미소를 보이셨다. 그게 형과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그 후 형이 아프시다는 말을 들었지만 병문안 한 번 제대로 못간 것이 가슴에 긴 아쉬움과 미안함으로 남아 있다. 2015년 6월, 메르스 사태로 전국에 혼란이 시작되었고, 국가 의료기관들이 모두 대기 상태가 되었을 때 형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
었다. 움직일 수가 없었고, 마음의 겨를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세월이 또 흐르고, 우리는 모두 남이 되어 각자 살아가는 모양이다.

그러나 형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이번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여전히 사람이 희망임을 일깨워준다. 이제 책으로 형의 삶을 만나게 되면서, 다시금 형의 얼굴과 목소리,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20년 넘게 정신보건과 사회 담론의 길을 함께했기에 형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진다. 형이 늘 하시던 일을 이제 내가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그러나 돌아서면 공허할 것이다. 아마도 한참을 그렇게 보낼 것 같다. 그럴 때마다 형이 그립다. 언제나 뒤에서 여유를 지닌 채 후배의 등을 두드려주시던 형이 앞으로도 여전히 그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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