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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의 자전적 소설 '창백한 말'

건강미디어l승인2017.08.01l수정2017.11.26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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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의 자전적 소설 '창백한 말'

손창호(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인권의학연구소 소장)

최근 “박열”이란 영화가 인기라고 합니다. 아직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 영화와 관련된 책 한 권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책이름은 “창백한 말(여기서 말은 영어로 horse이지 language가 아님^^)” 이고 저자는 '보리스 싸빈코프'라는 러시아인 정확히는 우크라이나 사람입니다. 싸빈코프는 아나키스트, 테러리스트 및 작가로 유명합니다. 소위 “폭탄, 권총 그리고 펜”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인물이지만 이쪽 세계에서는 엄청난 명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 우리 집사람이 좋아하는 장동건이 출연했던 영화이 영화의 대사 중에도 “싸빈코프” 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무정부주의로 번역된 아나키즘은 사실 적잖이 생소한 단어입니다. 우리나라에선 독립운동가 박열 정도가 그래도 알려진 편에 속한 사람일 것입니다. 흔히 테러, 살인, 이상주의, 영웅주의 등의 단어와 같이 연상되는 아나키즘은 좌와 우 양 측으로부터 열렬한 사랑의 대상인 동시에 철천지 원수로서 실제 역사에서는 기록되고 있습니다. 사실 무정부주의라는 번역은 이들을 모든 형태의 정치마저도 거부하는 공상주의자로 오해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는 모든 형태의 권력체를 거부한다기 보다는 인간이 가진 자발성과 우애에 기초한 사회를 지향한 사람들이며 이를 가로 막는 어떠한 형태의 독재나 억압에 행동으로 저항하고자 하는 사람이라 하는 것이 보다 더 적확한 정의라 할 것입니다. 좌우간 이들은 냉정한 정치적 계산과 같은 것은 경멸하고 순수한 열정을 더 높이 사는 경향성을 지닌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방법론적으로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테러를 택하였고 이러한 것은 결국 영웅적 개인을 낳게 됩니다. 하루 하루를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이런 사람들은 고민도 사랑도 치열하게 하곤 하였습니다.

▲ 박열과 그의 일본인연인 후미꼬 가네꼬. 일제치하에 국경을 뛰어넘은 이들의 사랑은 후미꼬 가네꼬가 감옥안에서 자살을 함으로써 막을 내립니다.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투쟁의 최전선에 서게 되었고 그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싸빈코프입니다. 1879년 지금의 우크라니아에서 태어난 싸빈코프는 귀족의 집안임에도 불구하고 급진적 성향의 어머니와 혁명 운동에서 목숨을 잃은 형의 영향 아래 스무 살이 되기 전부터 혁명운동에 뛰어들어 투옥과 수배의 나날을 보냅니다. 그는 피의 일요일로 상징되는 1905년 그 혼란의 절정기를 치닫던 러시아에서 수도 모스크바의 실질적 통치권자인 세르게이 알렉싼드로비치 대공 암살에 성공하게 됩니다. 러시아 황제에 대한 가장 격렬한 반대자였던 그는 1917년 황제가 물러나고 들어선 케렌스키 과도 정부에서 군사 총지휘관 및 국방부 차관직을 수행하나 내부의 정치적 견해 차이로 다시 물러나게 됩니다. 레닌의 볼세비키가 1917년 10월 혁명을 통해 러시아를 장악하게 되자 황제와 귀족의 수탈에 저항하던 그는 볼세비키의 일당독재에 대해 다시 격렬히 맞서서 싸웁니다. 결국 그는 예전 자신의 적이었던 귀족들이 주축이 된 러시아 백군에 가담하여 러시아 내전에 개입하게 된다. 끝까지 투쟁의 고삐를 늦추지 않던 그는 1924년 결국 체포되고 이듬해 감옥에서 아직도 그 사인이 논란이 되는 시체로 발견됩니다.
 
'창백한 말'은 이중 1905년 러시아를 무대로 한 이야기입니다. 소설이라기 보다는 싸빈코프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소설 형식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소설을 보기 전에 먼저 이해하여야 할 것이 1905년도에 러시아에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러시아에서 1905년은 정월부터 피비린내로 시작합니다. 당시 절대 왕권을 지닌 짜르(러시아 황제)의 폭정하에서 러시아의 민중들의 생활상은 형편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극심한 정치적 탄압으로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국외로 이미 도망치거나 유형을 가버린 살벌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때 러시아 정교회의 사제였던 가퐁이란 인물이 나타납니다. 가퐁 신부는 짜르에 대한 충성심과 민중에 대한 동정심을 동시에 가졌던 것 같습니다. 당시 도시 노동자들의 참혹한 생활상에 가퐁 신부는 동정심과 연민을 보여주었고 마땅한 자신의 대변자를 가지지 못하던 사람들은 가퐁 신부를 중심으로 몰려들어 대중들 사이에서 그의 인기는 수직상승하였습니다. 가퐁신부는 짜르에 대해 분노와 증오를 보이는 노동자들을 달래며 짜르가 사실 얼마나 자애로운 군주인가를 역설합니다. 그리고 현실생활의 피폐는 짜르를 둘러싼 부패한 일부 모리배의 소행이라고 연설합니다. 실제 가퐁 신부는 짜르에 대한 철저한 믿음을 가진 것 같습니다. 그는 1905년 1월 짜르에게 민중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하해같은 은혜를 내려줄 것을 청원하는 집회를 열게 됩니다. 그리고 수십만의 노동자들이 가퐁신부와 성모상 그리고 황제의 초상화를 앞세우고 “신이여 황제를 보호하소서” 라는 구호를 외치며 황제가 있는 궁전으로 행진하였습니다. 문제는 이 집회가 황제 측과 전혀 사전조율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엄청난 군중의 행진에 겁을 먹은 황제가 다짜고짜 총질과 강제 해산을 명령한 것입니다. 결국 이날 500명 이상의 사망과 수천 명의 부상자가 나왔습니다. 짜르가 결코 자기 편이 아니라는 것을 뼈 속 깊이 각인한 민중들은 다시 엄청난 반발을 하게 됩니다. 결국 짜르는 이러한 민중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두마” 라고 하는 러시아최초의 의회를 만들어서 약간의 민주주의를 허용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하에서 러시아 내의 혁명 세력 또는 운동권들은 두마를 통해 민주적인 법을 제정하고 합법적인 테두리에서 투쟁을 하자는 온건세력과 짜르가 물러나고 민중이 주인되는 그날까지 비타협적인 투쟁을 해야 한다는 강경파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창백한 말'은 이러한 혼란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 누군가 죽기전에 꼭 봐야할 만화중의 하나로 꼽았던 김혜린의 북해의 별이 만화도 인류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한 장면이었던 러시아혁명을 무대로 합니다. 대학시절 다른 이들은 주인공들의 처절한 사랑이야기에 눈물지을 때 저는 이 만화의 한 커트에서 레닌의 모습을 발견하고 나름대로 가슴뭉클(?) 하기도 했습니다.

'창백한 말'은 저자가 1905년 모스크바의 총 지도자이자 당시 러시아 전체에서 최대의 실력자로 꼽혔던 요즘으로 보면 국무총리 급이라 할 수 있는 세르게이 알렉싼드로비치 대공 암살 사건을 그 중심사건으로 합니다. 과연 인간이 인간을 죽일 수 있는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가 하는 테러리스트에게서 숙명적으로 따라다니는 갈등을 놀라울 정도로 담백하고 냉정하게 표현해 냅니다. 경찰과 밀정의 숲속을 미로처럼 헤매는 테러리스트의 생활은 일견 한편의 스릴러로 봐도 될 만큼 긴박하게 표현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이 가지는 미덕은 싸빈코프의 묘사방식입니다. 주변에 대한 놀라운 관찰력과 이를 자신 통해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포착하는 그의 글을 잠깐 감상하겠습니다.
 
정오의 뙤약별 속에서 나는 부드러운 대지에 누워 있다. 풀 이삭은 군대처럼 서 있고, 양귀비꽃은 새빨갛다. 점점이 흩어진 토끼풀에선 향기가 난다. 구름이 느긋하게 녹는다. 구름 속에서 매가 한가로이 선회한다. 부드럽게 날개짓을 하다가 사라진다. 매와 함께 세상도 사라진다. 무더위와 창공은 검은 점이 남을 뿐이다.
 
싸빈코프에게는 두 명의 여인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주인공(소설에서 이름은 조지)의 관계 역시 냉정하게 표현됩니다. 에르나는 폭탄제조를 맡은 팀원입니다. 에르나는 손이 큽니다. 에르나의 큰 손은 폭탄조제에는 유용할 지 모르지만 조지에게 섹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조지와 에르나의 관계를 이렇게 나타냅니다.
 
“봐, 에르나,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어?”
“아뇨.”
“그럼 내가 당신을 속인 건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한 적 없어?”
그녀는 몸을 떨고 대답하지 않는다.
“말해봐.”
“네, 말했어요.”
“계속 들어봐. 당신과 함께 있는 게 힘들어지면, 거짓말 하지 않고 털어놓을게. 당신 나를 믿지?”
“그러니까 이젠 울지 마. 난 다른 누구와 함께 있는 게 아니잖아. 당신과 함께 있어.”
나는 그녀에게 입맞춘다. 행복해져서 그녀는 말한다.
“내 소중한 사람,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러나 나는 그녀의 커다란 손에서 눈을 돌릴 수 없다.
 
또다른 여인은 이제 20살 된 하지만 이미 군장교의 아내가 되어버린 여인입니다. 에르나에게 냉정한 조지는 엘레나와의 관계에서는 처지가 바뀌어 엘레나를 독차지하고 싶어하고 그 남편에게 질투를 느낍니다. 이에 대한 20살 유부녀의 대답 역시 쉽지 않습니다. 조지의 품에서 엘레나가 얘기합니다.
 
“내 사랑, 지금 저녁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웅성거리고, 풀이 속삭여요.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요. 더 무엇을 바라죠? 어째서 지난 일을 생각해요? 어째서 미래를 알려고 하죠? 날 괴롭히지 말아요. 괴롭힐 필요 없어요. 우리 둘이 기뻐하며, 살아갈 거예요. 난 슬픔이나 눈물은 원치 않아요......”

▲ 보리스 사빈꼬프 

장편이라기 보다 좀 긴 중편소설정도의 분량이라 읽기에도 크게 벅차지 않으며 사랑, 조국, 정의, 혁명, 삶과 죽음의 문제를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행동하였던 한 사람을 느끼고 싶다면 “창백한 말”은 후회되지 않을 책이기에 일독을 권해드립니다. 1917년 볼세비키 혁명이후 러시아 백군으로 소련의 붉은 군대와 싸우는 싸빈코프의 이야기는 “검은 말” 이라는 또다른 싸빈코프의 소설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창백한 말을 본 후 검은 말 까지 읽으면 기쁨은 두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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