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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대 간첩단 조작사건과 강종헌

건강미디어l승인2016.06.03l수정2016.08.30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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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대 간첩단 조작사건과 강종헌

인권의학연구소

재일동포 출신 서울의대생이었던 강종헌은 유신정권 아래서 고문에 의해 간첩으로 조작되어 사형을 선고 받는다. 2011년 법원에서 재심을 개시하여 2015년 8월 최종적으로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된다, 무려 40년만에 간첩 혐의를 벗게 된다. (편집자 주)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조작 사건의 배경

해방 직후 2백여만 명이었던 재일 동포는 일본 전국에 친목 단체를 조직하고, 1945년 10월 15일에는 재일조선인연맹(조련)을 결성하여 귀국자의 원조, 자녀들의 교육에 종사했다. 그러나 남북의 분단과 한국전쟁의 발발은 재일동포 사회에도 심각한 영향을 주어, 재일동포 사회가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으로 나뉘어 졌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로 일본은 ‘남한’만의 국교를 회복하여, 대한민국을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제3조)‘로 규정했다. 새로운 관계가 한일 간에 형성되어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 억압구조도 ’한일 관계의 발전‘과 궤를 함께하여 재생산되고 있었다.

1967년 이후 한국 정부는 ‘모국유학생제도’를 실시하였다. 젊은 세대의 재일 한국인이 조국에 장기 체재하며 말과 문화, 역사 등을 배우는 기회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재일동포들은 일본에서 오랜 세월 고통스러운 생활을 보내고 자신의 뼈만은 고국에 묻히고 싶다는 조국을 향한 그리움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들 재일동포는 조국의 분단 상황과 일본 사회의 차별 정책이라는 이중의 압박 속에서, 차별, 억압을 견뎌내고 자신들이 속한 상황을 변화시키려고 나름대로의 노력을 해왔다. 이들 재일동포들은 자신들의 2세, 3세들을 ‘조국의 품에서 공부하는 것을 꿈꾸며’ 유학을 보냈다.

1975년 11월 22일 발표된 재일동포 유학생 모국유학생간첩사건은 유신 선포 이래 격렬해진 학생 시위를 북한의 배후 조종으로 몰아가려는 의도가 작용했다. 당시 수사 경위를 발표했던 중정 김기춘 수사국장은 “최근 수년 간 대학가에서 벌어졌던 데모가 북괴 간첩의 배후 조종에 의한 것임을 증명한 케이스”라고 언명한 바 있다.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모국에 유학 온 일부 재일교포 유학생들은 반공법, 국가보안법에 의해 ‘간첩’이라는 이름으로 차디찬 감옥에 보내졌던 것이었다. 적어도 공산당이 합법화된 일본에서, 그리고 민단과 총련 사람들이 아래, 윗집에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환경에서 자란 동포 2세들에게 국가보안법, 간첩이라는 것은 말조차 생소한 것이었다.

1970~80년대 발생한 ‘재일교포유학생사건’ 피해자들은 대체로 재일교포 2세들로서, 모국에 유학을 와서 재외국민교육원(연구소)에서 한국어 연수를 받고 대학에 입학하여 재학 중 중앙정보부 또는 보안사에 의해 연행되었다. 피해자의 대부분은 일본에서 고교 또는 대학 재학 시에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우기 위해 동료 또는 선배를 통해 조선문화연구회, 한국학생동맹, 재일조선인유학생동맹 등에서 활동한 바가 있었는데, 이것이 한국의 수사기관에 의해 반국가단체구성원에 의한 지령 및 공작금 수수, 기밀 탐지 등 간첩 혐의로 되어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처벌받았다.

강종헌 간첩조작사건과 재심

강종헌(1951년생, 당시 24세) 선생은 일본 나라겐 야마도 다카다시 하나조노죠 726번지에서 태어나 오사카 부립 덴노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1년 4월 서울대학교 부설 재외국민교육연구소를 수학한 다음 1972년 3월 서울대학교 의예과에 입학했다. 의대 재학 중 ‘사회의학연구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본과 2학년 재학 중 1975년 11월 28일 보안사 수사관에 의해 연행되어 1976년 2월 23일 국가보안법 등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1976년 7월 7일 서울 형사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11월 16일 서울고등법원에서 항소 기각, 1977년 3월 15일 대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었다. 그 후 강종헌 선생은 복역 중이던 1982년 3월 2일 전두환 대통령 취임 1주년에 무기로 감형되었다가 1984년 징역 20년으로 감형되었고, 1988년 2월 26일 잔여 형 반감으로 감형되었다가 1988년 12월 20일 가석방되었다. 가석방된 후에는 일본으로 돌아가 한국문제연구소를 설립하고 한통련, 범민련 등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한 활동을 꾸준히 전개했고 와세대 대학 객원교수로 강의했다.

2010년 6월 30일 진실화해위원회가 “재일동포 강종헌 간첩 조작 의혹 사건”에 대해 재심권고 결정을 내렸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수사 기록, 관련 기록, 관련자 진술을 종합해보면, 강종헌이 장기간 보안사에서 불법 구금되어 수사 받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보안사 수사관들에게 상당한 강도의 가혹 행위를 당하였음이 인정된다.”고 결론짓고, “국가는 진실규명 대상자 강종헌에게 불법 구금과 가혹 행위를 가한 사실에 대하여 동인에게 사과하고, 형사소송법이 정한 바에 따라 재심을 진행하는 등 화해를 이루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강종헌 선생은 즉시 법원에 재심 신청을 하여 2011년 10월 12일 재심 개시 결정되었다. 2013년 1월 24일 서울고등법원 재판부는 "당시 민간인을 상대로 수사권이 없는 육군 보안사령부 소속 수사관들이 경찰 단계의 수사를 담당한 것은 불법 수사에 해당한다."며 "보안사 소속 수사관들이 수집한 증거는 모두 위법 증거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수사 기관이 수집한 증거의 전부 또는 대부분이 고문·가혹 행위 등 위법적으로 수집된 것이어서 증거 능력이 없다"고 판시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2013년 9월 재심 과정에서 통합진보당 비례대표(18번) 승계 문제로 논란을 빚기도 했다. 당시 그는 “지금 '종북몰이'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에게 거북한 사실이지만, 나는 1월 24일 서울고등법원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아 일단 간첩 혐의는 벗은 상태입니다. 하지만 여당과 보수 언론, 그리고 국민 대부분의 시각은 '검찰이 상고했으니 무죄가 확정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간첩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똑같은 논리로, 유죄가 확정되지도 않은 이 의원과 진보당 관계자들을 내란 음모로 단죄하려는 것은 얼마나 기막힌 자가 당착이며 자기모순이겠습니까? 혹자는 출소 후 나의 행적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지금도 북의 지령을 받는 종북이 맞다.'고 주장합니다. 만일 그러한 혐의가 있다면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여 나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하면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억지 수사가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불행히도 그런 처지에 놓인다면 나도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당당히 맞설 것입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대법원은 2015년 8월 21일 강종헌 선생에 대해 재심 무죄를 확정했다.

"물고문, 전기고문까지…" 나는 간첩이 되었다http://www.nocutnews.co.kr/news/4491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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