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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으면서 죽을수 있는 병원'

이시가와 긴이쿄와 죠호쿠 병원 박찬호l승인2016.05.13l수정2016.07.02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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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웃으면서 죽을수 있는 병원]의 한국어 번역출판을 위해 주요 무대인 일본의 가나자와시에 있는 죠호쿠병원(城北病院)을 원진녹색병원의 김미정선생님과(가정의학과 전문의) 방문하고 나서 쓴 방문기이자, 책의 뒷쪽에 포함될 '역자후기'이기도 합니다. 2회에걸쳐 연재하고자 합니다. 

 

1. 죠호쿠 병원의 탄생과 경과

본서의 주무대인 죠호쿠 병원은 여러 면에서 녹색병원과 비슷하다. 주택가 한복판에 있는 것도 그렇고, 건물이 낡은 것도 그렇고, 병상수도 비슷하다. 다만 일본과 한국의 의료제도의 차이로 인하여 급성기병동, 요양병동, 장기요양병동이 모두 한 건물에 있다는 점이 색다르다. 직원수도 600명이 넘어 380명에 불과한 녹색병원과 비교하면 거의 두배 가까운 차이가 난다. 주택가라 하지만 중심가인 가나자와 역에서 걸어가도 15분이면 닿는 거리에 불과하며, 사실상 서민 밀집지역이라 한적한 느낌이 물씬 든다.

죠호쿠병원이 있는 가나자와라는 시는 인구 47만명의 작은 도시이며, 이시가와(石川)현에 속해있다. 이시가와 현은 일본에서는 호쿠리쿠(北陸)라 해가지고 고도경제성장기에 사실상 경제개발이 배제된 산간 지역이면서, 동해와 접한 임해지역이다. 신간센이 2015년에 개통될 만큼 인구 과소화가 현저한 지역이다.

죠호쿠병원을 설립한 조직은 공익사단법인이시가와근로자의료협회(公益社団法人石川勤労者医療協会, 약칭 이시가와 긴이쿄)이다. 민의련의 50년 역사책인 [차별없는 평등의료를 지향하며]에는 다음과 같은 이시가와 긴이쿄의 초기 활동에 대한 내용이 나와있다.

 

    1949년 8월 이시가와 현에 시로가네 진료소를 개설했지만 1950년말

     소장이 퇴직해 카미후타(上二)병원의 호시노가즈오(星野和夫)가 부임했다.

     테라이노마치에서는 1951년에 농민조합이 테라이노진료소를 설립했고,

     1953년 2월 사단법인 이시가와 후생협회를 결성해 두 진료소를 합쳤으며,

     이 힘을 배경으로 1953년 10월 우치나다(内灘)진료소를 설립하고 미군들이

     만들려고 했던 우치나다 포 연습장 설치반대의 거점역할을 했다.

 

▲ 병원 인근에 있는 이시가와 긴이쿄 사무실

이시가와 긴이쿄(石川勤医協)는 당초 이시가와 후생협회로 출발하여 시로가네 진료소와 우치나다 진료소를 설립했다. 당시 일본정부는 우치나다에 미군의 포 연습장을 설치하려 했는 데, 이시가와 긴이쿄는 이를 주민들과 저지하는 데 앞장섰으며, 이 투쟁을 통해 주민들의 염원으로 진료소를 세웠다. 따라서 일본정부의 탄압이 극심했는 데, 예를들면 진료소에 생활보호대상자 진료를 허가하지 않았다. 당시 생활보호대상자에 대한 진료를 허가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이런 사람들이 집중한 밀집지역에 건설한 진료소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진료를 하지 말라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생활보호대상자 지정기관을 인정하지 않은 일본정부의 탄압은 60년대에 들어와서 처음엔 기한을 설정하는 한시적 인정으로 양보하다가, 14년이나 지난 1974년에야 비로소 완전히 해소되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우치나다 진료소 바로 옆에 일본정부가 자금을 지원한 진료소를 개설하였다. 철저하게 진료소를 고사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초기의 어려움을 주민들과 함께 극복하고, 또 정치투쟁에 몰두하여 의료의 내실화가 취약했던 상황을 반성하면서 죠호쿠 병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죠호쿠진료소를 1956년 12월에 19병상으로 개설하였다. 죠호쿠 진료소가 개설된 가나자와의 아사노(浅野)지역은 당시까지 의료기관이 없었던 지역이며, 근로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지역이었다. 이때의 근로자라 함은 대부분이 재일조선인과 일용노동자인데, 일용노동자의 상당수가 당시 일본에서 하층민 취급받던 부락민이었다. 이런 점에 비추어볼 때 죠호쿠 병원은 처음부터 한국과도 상당한 인연이 있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죠호쿠 진료소는 설립당시부터 진료소설립의 목적을 생의 마지막까지 안심하고 의지할 수 있는 병원과, 이시가와 지역의 센터병원의 필요성을 충족하기 위해 계획된 진료소였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의 상황은 상당히 열악했다. 이시가와 킨이쿄는 이런 상황을 환자회를 통한 적극적인 건강예방활동과 일용노동자 집단검진으로 극복하였다.

죠호쿠 병원의 초기 정착을 위한 중요한 두가지 활동을 다시 한번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일용노동자 집단검진과 환자회 활동이다. 일용노동자 집단검진은 당시 지역주민의 대다수가 일용노동자인 상황에서 이들을 마냥 진료소에서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작업현장으로 찾아가서 적극적인 예방검진활동을 시행한 것이다. 맨 처음에는 일용노동자들이 한번씩 방문하는 직업소개소에서 검진을 시작했다. 일용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기생충 검사를 처음으로 시행했고, 이후에는 일용노동자의 현장을 찾아가 집단검진을 통해 주민조직을 확대해 갔다. 일용노동자의 집단검진에 재일조선인 노동자가 많았음은 이미 언급한 바다. 한마디로 지역 주민을 찾아가는 적극적인 진료활동을 통해서 주민들과의 유대관계를 강화한 것이다. 이런 활동이 지속되자 이제 지역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일용노동자들의 얼굴을 거의 아는 상황에 도달했던 것이다.

한편 당시 가나자와 지역은 뇌졸중환자들이 많았는데, 지역자체가 추위가 심하고, 또 생선 등의 절임음식 등이 많아 염분의 과다섭취로 인해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뇌졸중이 한번 발생하면 먹고살기 위해 식구들은 다 일하러 나가고, 환자만 집에 누워 지내면서 온갖 냄새는 물론이고 치료조차 제대로 이루어지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고혈압 환자들을 대상으로 쵸세카이(長生会)라는 환자회를 조직해갔다. 식생활개선이나 고혈압체크 등 예방활동을 통해서 뇌졸중 없이 오래 살자는 의미로 쵸세카이를 조직했던 것이다. 죠호쿠병원에서 환자회는 특별한 의미를 갖고 이때부터 전직원이 참여하는 운동으로 발전해간다. 대개 민의련 병원들이 주민조직인 토모노카이(友の会)등을 통해서 주민과 관계를 맺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이러한 환자회 조직이 주민조직을 확산시키는 데 많은 밑거름이었음을 죠호쿠 병원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쵸세카이를 통한 환자회 활동과 병원직원의 적극적인 참여는 가나자와 지역의 뇌졸중을 현저하게 개선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죠호쿠병원의 명예원장이면서, 전 민의련회장이었던 아자미 쇼조(莇 昭三)는 그의 저서 [생명의 평등을 개척하며](命の平等を拓く, 일본평론사, 2013년)에서 죠세카이라는 조직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아래에서 약간 길지만 인용해 둔다.

 

     

당시 죠호쿠진료소의 하루평균 외래환자는 약 42명 전후였다. 입원환자도 약 19명 정도였지만, 결핵, 네프로제, 뇌졸중후유증 등의 환자로 긴급한 치료가 필요하지 않았고, 긴밀하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가능했다.

이런 상황의 진료소에도 가끔 걸려오는 전화가 있었다. “켄로쿠엔 현장에서 ㅇㅇ씨가 쓰러졌어요!, 빨리 와주세요.”라는 내용이었다. 즉각 외래에 진료받으러 온 환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스쿠터를 타고 달려갔다.

서둘러 가서 진료를 해보면 뇌출혈이었다. 게다가 몇 번이나 “혈압이 높아요.”하면서 순회검진 할 때마다 치료를 권유했던 낯이 익은 노동자였다.

이러한 일은 일용노동 현장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사노 구역이나 그 주변 가정에서 의뢰를 해 오는 왕진이 자주 있었다. 다급하게 불러서 가보면 아주 잘아는 사람으로 중풍이었다. 진료기록을 보면 병명으로 <고혈압>이 적혀있고, 처방란에는 몇 개월 전까지 혈압약을 먹었지만, 현재는 약이 중단된 사례가 자주 있었다. 고혈압 치료중단 환자가 중풍이 된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하면서, “의사라는 사람은 환자를 진단만 해놓으면 괜찮은 것인가, 절대 아니다.”, “환자가 병원에 오면 진단만 하면 좋은 것인가, 절대 아니다.!” “환자가 질병을 스스로 이해하지 않으면, 치료가 될 수 없다.!”, “환자 스스로가 질병과 싸우지 않는 한, 의사가 진단을 해봐야 의미가 없다.” 이런 식의 문제의식을 늘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고혈압환자에 대한 교육을 시작하기 위해서 혈압이 높은 환자들의 모임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해서 만든 모임이 쵸세카이(長生会)였다.([생명의 평등을 개척하며](命の平等を拓く), 아자미 쇼조(莇 昭三), 일본평론사, 2013년, 27페이지)

 

쵸세카이 활동을 통해 뇌졸중 예방에 도움이 되고, 일정한 성과를 거두자 죠호쿠 병원에서는 당뇨병환자모임 ‘미노리카이’가 탄생하였고, 그후 신장환자의 ‘소라마메카이’, ‘천식친구모임’ 등등 환자모임이 계속해서 만들어졌다. 이런 모임은 모두 ‘쵸세카이’ 조직방침을 따라 배워 탄생했다. 죠호쿠병원은 일본에서도 몇 안되는 만성질병관리가 뛰어난 병원이 되었고, 민의련내에서는 단연 선두를 차지했다. 말하자면 전일본민의련의 만성질병관리 시스템은 ‘쵸세카이’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쵸세카이 활동을 통해 만들어진 유명한 구호가 바로 “의료는 환자와의 공동행위”라는 것이다. 이 구호는 지금까지 민의련의 활동을 상징하는 내용으로 계승되고 있다. 쵸세카이는 이후 1960년대 말 노인의료비 무료화를 실현하기 위한 가두서명운동과 가나자와 시장실 연좌농성으로 운동의 선두에 서면서 일약 주민들의 보건의료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시가와 킨이쿄가 주민들과 함께 하는 조직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또 하나 있었는 데, 소아마비 백신 문제였다. 1960년 7월 이시가와현에서 소아마비 환자가 대량으로 발생했다. 이 해는 일본 전국적으로도 많은 소아마비 환자가 발생한 해이다. 일본정부로서는 실상 대책이 없었는 데, 이로인해 엄마들이 소아마비 백신 수입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소련은 생백신을 개발하였으며, 효과가 분명히 밝혀졌으나 일본정부가 수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일본의 보수 쪽에서 빨갱이라고 비난하는 상황에서 “아이들의 생명을 지키는 일에 좌와 우가 무슨 소용인가?”라고 주장하면서 상황을 극복해갔다. 결국 이러한 노력으로 소아마비 문제는 해결되었다.

▲ 죠호쿠병원 정문

죠호쿠 진료소가 병원으로 확대한 것은 지금 생각하면 잘 이해가 안될 수도 있지만 환자들의 ‘이불’문제였다. 일본은 1958년부터 병원급에서는 급식, 간호, 침구를 환자에게 보험수가로 공급하는 기준이 제정되었으나, 진료소에는 이런 규정이 적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죠호쿠진료소에 입원할 경우에는 환자들이 자신의 이불을 갖고 와야 했는데, 이런 점들이 가난한 가구의 경우에는 곤란한 경우가 많았다. 주민들로부터도 이불문제는 어떻게 해서든 해결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많았다. 결국 죠호쿠진료소의 진료실적이 늘어나서 입원환자를 수용하기 위해 병원화를 결정했다기 보다는 지역주민들의 이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불제공이 보험으로 보장된 병원화를 결정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병원이 된 곳은 죠호쿠 병원 말고도 오사카 민의련의 미미하라(耳原)병원, 교토의 카미후타(上二)병원도 마찬가지였다. 주민들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다. 결국 1960년 병원화를 결의하고, 1962년 5월 건물공사 등을 수반하여 우여곡절 끝에 27병상의 병원을 개원하였다. 죠호쿠병원의 시기별 병상확대 등 주요시설 연표는 다음과 같다.

ㅇ 1965년 46병상,

ㅇ 1966년 60병상

ㅇ 1970년 투시엑스레이 장치를 도입.

ㅇ 1974년 124병상으로 증설했으나, 심각한 간호사 부족으로 일부는 사용 못함.

ㅇ 1975년 야간투석 시작.

ㅇ 1981년 185병상, 응급지정병원

ㅇ 1986년 250병상

ㅇ 2000년 장기요양병상개설

ㅇ 2003년 임상수련지정병원

ㅇ 2004년 305병상

ㅇ 2007년 314병상

박찬호  bluepol620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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