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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중 군 위안대 설치와 몽키하우스

백재중l승인2015.11.09l수정2018.09.20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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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7일 SBS 시사 프로그램인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성 매개 감염증(성병)을 앓고 있던 기지촌 여성들의 구금소였던 일명 '몽키하우스'에 대한 고발이 있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미군 기지나 전선 가까이 사창가가 형성되는데 당연히 성병이 만연할 수밖에 없었다. 군대에서는 사기 진작과 성병 예방을 명목으로 군위안대를 설치 운영한다. 한국전쟁에서의 군 위안대 설치는 당시의 공식 기록과 일부 군인들의 기록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군 위안대에서는 위안부 대상으로 주 2회 성병 검사를 시행하여 성병 확산을 막고자 하였다. 1951년 설치된 군위안대는 1954년 3월 폐지된다. 한국전쟁 당시의 군 위안대 설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연속선 상에 놓여 있다. 해방 후 한국 군대를 지휘하는 장교들은 대부분 일본군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일본군에서의 경험을 살려 한국전쟁 시기 위안대를 설치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전쟁 후에도 매매춘은 미군기지 주변과 대도시 사창가를 중심으로 번성하였다.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4년 전염병예방법에서 성병을 제3종 법정 전염병으로 규정하고, 강제진단을 실시할 수 있게 하였지만, 성병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은 될 수 없었다. 이 시기는 매춘여성의 숫자가 급증하였을 뿐 아니라, 성병 감염률도 대단히 높아 1950년대 후반에는 100만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매춘여성의 수나 성병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거의 부재하다시피 하여 제대로 된 성병 대책이 나오기 힘들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미군이 우리나라 계속 남아 주둔하게 되면서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동두천 등 미군 기지 주변에는 기지촌이 발달했다. 한국 정부와 주한미군은 미군기지 주변 매춘을 용인하였으며 이를 통한 성병 확산을 막기 위해 기지촌 여성들을 진료하고 치료하는 체계도 마련한다. 이는 미군들을 성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기지촌 여성들이 가장 끔찍하고 두려운 경험으로 꼽는 것 중의 하나가 성병관리와 그에 따른 강제 치료였다.  ‘토벌’이라고 부르는 성병 정기검진을 강제적으로 시행하였고 검진에서 탈락하면 낙검자 수용소에 감금하여 강제로 치료 받도록 하였다. 수용소 쇠창살에 매달린 감금 여성들이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보인다해서 사람들은 이 곳을 ‘몽키하우스’라고 불렀다고 한다. 여기에 억류된 여성들은 미군에서 제공한 항생제 치료를 강제로 받아야 했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몽키하우스들이 당시 정부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기지촌 여성들이 성병에 걸리면 미군들에게 전염될 가능성이 높아져서 미군은 이에 대한 대책을 요구했고 이에 부응하여 정부에서는 강제 검진과 수용소 설치를 통해 관리에 들어 갔다. 몽키하우스에 감금되면 성병 치료를 위해 페니실린 주사를 맞게 되는데 주사로 인한 쇼크로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 @SBS '그것이 알고 싶다'

  ‘그것이 알고 샆다’에서는 전북 군산 작은 마을에 미군들만 이용할 수 있는‘아메리카 타운’을 만들어 성매매를 조장했다는 사실도 밝히고 있다. 대규모 한미군사합동훈련 시에는 미군 인근에 ‘임시 위안소’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2014년 7월 25일 서울여성플라자 건물에서 10여명의 여성이 기자회견을 갖는다. 이들은 미군 기지촌 출신 여성들로 국가를 상대로 피해보상 소송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대한민국 정부는 한국전쟁 이후 기지촌을 조성하고 사실상 관리하면서 여성의 인권을 침해했습니다. 윤락행위 방지법과 유엔 인신매매 금지협약은 휴지조각이 되었습니다. 성폭력과 구타, 감금, 강제 낙태, 성병 강제검진 및 치료, 성매매업소 주인과 경찰공무원의 유착비리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운 국가 범죄가 있었습니다.” 소송을 맡은 대표 번호사의 인사말 중 일부이다.

  1961년 11월 정부는 ‘윤락행위방지법’을 만들어 성매매를 단속하는 척 하였으나 뒤로는 집창촌을 ‘특정지역’이라는 단어로 묶어 성매매를 묵인하였다. 일제 시대 때 유지되다가 해방 후 폐지된 공창제가 변형된 방식으로 지속되고 있는 셈이었다. 이러한 기조는 2004년 '성매매특별법'에 의해 윤락행위방지법이 폐지될 때까지 지속된다.  경제 호황을 누리던 일본인들이 성매매 관광을 와 많은 돈을 뿌리고 가고 있었고, 미군 기지촌의 활성화 또한 ‘최대의 우방’인 미국과의 동맹의 상징이었기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정부는 기지촌 성매매 여성들에게 성병 예방과 반공 사상, 영어 등을 교육하며 기지촌 거대화의 기초를 다지기도 했다.

  1970-80년대 경제성장 시기 생산성 증대 압력과 경제성장 압박은 나라의 미래와 함께 가정 생계를 책임지는 남성 가장들에게 커다란 스트레스였다. 별다른 놀이 문화가 없던 살벌한 나날들, 가장들은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와 숨 막히는 권력의 압제를 벗어나는 방법으로 성매매를 택했다. 집창촌은 80년 이후의 5공화국 시절을 맞아 쿠데타를 가리려는 군사정부의 정책 아래 국민의 3S(Screen, Sports, Sex) 중 하나로 변모한다. 통금이 해제되고 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 개최에 맞쳐 규제가 완화되면서 산업형 성매매와 음성적 매매춘이 등장해 성매매는 그 등장 이래 최대의 전성기를 맞기도 했다.

 

백재중  jjbaik9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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