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 2023.1.15 일 16:52

쿠바를 만나다

체 게바라의 딸, 알레이나 게바라와의 만남 박지선l승인2014.12.18l수정2015.04.24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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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언젠가부터 내게 쿠바는, 말하고 나면 2초 정도의 멈춤pause을 요구하는 그런 단어였다. 쿠바, 라고 말한 뒤 줄줄이 딸려 나오는 단어인 무상의료, 체 게바라, 야구,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 쨍 하고 내려 쬐는 햇살의 이미지까지,… 로망의 결정체, 로망의 집약체라고나 할까?

그래서 막상 쿠바에 갈 기회가 덜컥 생겼을 때, 나의 이 환상이 깨질까 하는 두려운 면이 있었다. 그러나 그건 잠시고 쿠바를 가게 되자, 나는 가는 곳마다 '나 쿠바가요' 외치며 자랑을 해댔다. 물론 이 글도 자랑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주변 사람들에게 ‘쿠바 간다’라고 말하면 반응은 한결 같다. 일반적 사람들은 ‘거기 위험한 곳 아니야?’란 반응이고, 운동권들은 ‘와 부럽다!’고 한다.

처음 쿠바에 갈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알게 된 것은 작년 초 인의협 국제위원회에서 김이수 선생님이 하신 발표를 통해서였다. 한-쿠바교류회라는 단체를 만들 예정이고, 본인은 십여 년 전부터 자주 방문 하셨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해마다 같이 갈 사람들을 모집하고 있으니 많이 참여해달라고 하셨다. 그때만 해도 나는 열흘 넘게 병원을 어떻게 비우냐고 생각하며 침만 흘렸다. 그러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었던 건지, ‘일단 질러보자’ 정신이라 가능했던 건지 일년 만에 기회가 온 것이다. 2월 1일부터 9박10일간의 짜인 일정에 합류하기로 한 것이 1월 초였으니 준비할 시간도 부족했다.

난 여행 전 머리 싸매고 공부하는 타입은 아니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뭐랄까, 여행이라기보단 공부하러 간다는 생각이 컸고, 뭔가 배워와야 한다는 강박에 상당히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일단 쿠바 관련 책을 사 모으고 틈만 나면 남의 블로그를 기웃거렸다. 특히 쿠바 의료에 관한 책은 ‘요시다 타로’가 독보적이었다. 수년 전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을 감명 깊게 읽었던 터라 반가웠다. 지금 생각해봐도 쿠바에 대한 지식은 출발 전에 더 많이 쌓았던 것 같다. 보름 넘게 쿠바, 쿠바 하다 보니 벌써 두어 번 다녀온 듯한 느낌이 들 무렵, 드디어 그 날이 왔다.

 

도대체 언제 도착하는 거니?

2월1일 오후, 설렘을 안고 인천공항으로 출발했다. 부산, 제주, 충주, 홍성 등 전국 각지에서 온 일행들과 어색한 첫인사를 나누고 짧은 오리엔테이션을 가졌다. 김이수 선생님이 실무를 보시고 강정마을 늙은 전사로 알려진 권술용 선생님이 우리 팀의 단장 역할을 하기로 했다. 우리 팀의 정식 명칭은 ‘15차 쿠바교류전 13차 생태공동체 순례단’ 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번 쿠바 방문팀은 두 개 단체에서 모은 팀이 하나로 움직이는 형태였다. 처음 계획서를 받았을 땐 의료에 관련된 기관 방문이 많아 의료관련 직종들이 많이 올 거라 생각했는데 의료관련 직종은 전체 18명 중에서 4명(이 중 3명이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회원) 이었고 그 외 고등학교 선생님, 대학 교수님, 대학생, 환경운동가, 심지어 수필작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인천공항 오리엔테이션에서 현지 간사 겸 통역을 맡아 주실 분이 다큐멘터리 영화 '쿠바의 연인' 정호현감독님이란 얘길 듣고는 펄쩍 뛸 뻔 했다. 유학 시절 열살 연하의 쿠바 남자와 사랑에 빠진 본인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분인데, 작년에 이 영화를 극장까지 가서 보고 쿠바에 대한 로망을 증폭시켰던 터라 얼른 만나서 싸인 받고픈 마음에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쿠바로 가는 갈은 너무너무 멀었다. 인천에서 캐나다 밴쿠버까지 10시간 넘게 날아간 후 비행기를 갈아타고, 다시 4시간 반을 날아가 캐나다 토론토에 도착, 거기서 일박을 하고 다음날 아침 다시 쿠바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으니 비행시간만 장장 20시간에 이르는 기나긴 여정이었다. 멕시코를 통하는 등 다른 방법도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쿠바는 우리에게 먼 나라임은 틀림없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의 호세마르티공항에 내리자 맨 먼저 눈에 띈 것은 낡은 시설과 공항에 근무하는 언니들의 화려한 망사스타킹이었다. 딱딱한 정복을 한껏 볼륨을 살려 멋스럽게 차려 입은 언니들이 국내에선 보기 힘든 망사 스타킹으로 스타일을 완성하고 있었다. ‘와, 멋지다.’ 이런 감탄 속에 약간은 시장통 같은 입국 과정을 얼렁뚱땅 넘기고 나와보니 정호현 감독님과 현지 간사인 태우 학생이 우리를 마중 나와 있었다. 아, 지금 생각해보니 싸인을 안받았다. 이런,...

일행 중에 짐이 보안 검색에 걸린 분이 있어, 나는 입구에서 기다리는 시간 동안 '나의 쿠바'와 감격의 첫인사를 나눴다. 세계 어느 공항이 다 그렇듯 입국장은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 연인, 친구들로 가슴 찡한 장면을 많이 볼 수 있다. 감정에 솔직한 쿠바인들은 입국장에서도 눈물과 키스와 진한 포옹을 숨기지 않았다. 아예 목놓아 우는 어느 아가씨를 보곤 나도 그만 코끝이 찡해오기도 했다. 겨울의 절정이었던 한국, 캐나다를 거쳐 쿠바 땅을 밟으니 선선한 밤공기만으로도 마음이 노곤노곤해지는 느낌이었다. 숙소인 호텔에 도착하니 로비에서 어깨가 절로 들썩거려지는 라틴음악이 들리고, 각 척추가 따로 움직이는 댄서들이 눈에 띈다. 아.. 드디어 쿠바에 도착했구나!

 

로망은 현실이 되고……

첫날 거리에서 맨 먼저 눈에 띈 것은 미국산 올드카였다. 오스틴파워, 백투더퓨처 같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60-70년대 미국 차들이 거리를 누비고 있었고, 사이사이에 폐차장에서 막 가져 나온 듯 한 우리나라 소형차들도 보였다. 물론 좋은 차도 간혹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이런 오래된 차들이 뿜어내는 매연 때문에 시내 공기는 생각보다 나빴다. 때문에 아직도 쿠바 거리를 생각하면 목이 매캐해지는 착각이 들곤 한다. 그래도   하늘은 쾌청하고 나무들은 높고 푸르렀으며 오래된 유럽식 건물들과 이 모든 장면이 어우러져 영화의 한 장면 속에 서 있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첫 일정으로 쿠바국민우호협회(ICAP)를 방문했다. 이곳은 외국에서 온 NGO나 NPO들을 쿠바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맞이하는 곳으로, 쿠바에 대한 설명과 간단한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쿠바는 미국 최남단 플로리다에서 채 100km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위치한 동서로 길쭉한 모양의 큰 섬으로, 160여 개의 작은 섬으로 구성된다. 국토의 대부분은 평야이며 산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곳은 3곳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국토 면적은 남한보다 조금 더 크며, 인구는 천백만 명 가량 이다. 스페인어를 사용하며, 우리가 머물렀던 한겨울에도 우리나라 늦여름 정도의 날씨를 보였다. 사회주의 국가이며, 스페인 및 아프리카 후예들과 그들과 원주민의 혼혈족인 메스티소, 물라토 등 다양한 민족구성을 이루고 있다. 외세 침략으로 얼룩진 쿠바의 역사는 지정학적 특성상 필연적일 수 밖에 없어 보인다. 1959년 혁명에 성공한 이후 소련과의 긴밀한 협조로 미국의 턱 밑에서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왔으나, 동구권 몰락 이후 석유 공급이 끊기고, 더욱 심해진 미국의 봉쇄정책으로 인해 199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 아주 힘든 시기를 겪어오고 있다.

모두가 저 작은 나라가 곧 무너질 거라고 했지만, 2000년대 들어서는 오히려 석유가 고갈된 후 대안모델이 되는 국가로 주목 받으면서 도시농업, 무상의료 등을 배우려는 우리 같은 관광객의 숫자도 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국민총생산이 627억, 인민 평균 월급이 $15 정도인 소위 ‘못사는 나라’이며 실제 들여다 본 국민들의 생활도 궁핍하기 이를 데 없었다. 쿠바에 오기 전 수많은 영화, 책, 여행기 속에서 ‘쿠바 국민들은 경제적으로 어렵지만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라고 보고 들어왔다. 실제 그런지 확인하는 것도 이번 여행의 목표 중 하나이긴 했는데 사실 첫날에는 그런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

오후에는 도시농업을 하고 있는 협동 농장을 직접 방문하여 쿠바가 자랑하는 유기 농업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농업에는 문외한인지라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지렁이를 사용하고, 다양한 작물을 곁에 심음으로써 농약대신 천적을 이용  하는 등의 방법을 쓰고 있었다. 안내를 맡아준 분은 전직 농림부 고위 공무원 출신으로 이곳에서는 일반 노동자들과 똑같이 일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이 협동 농장은 동료들이 서로의 업무 능력을 평가하여 승진하고, 직위에 따라 월급이 다르다고 하였다. 안내 해주시는 분의 월급은 쿠바 돈으로 800페소 정도로 나중에 들은 쿠바 의사의 월급보다도 많았다. 아주 유머러스 하신 분으로, 안내 받는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았으나 우리 일행 중 환경운동 하시는 분이 이 농장에서 사용중인 시설에 석면이 있다고 지적하자 살짝 자존심 상한 듯 했다. 비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쓴 것이겠지만 세계 곳곳에서 유기농업을 배우러 오는 이 곳에 대한 자부심에 살짝 흠집을 주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유기농업과 쿠바인이 생각하는 유기농업은 차이가 있다. 선진국의 유기농업은 ‘안전’에 최고 가치를 두지만 쿠바에서 말하는 유기농업은 ‘자급자족’에 무게를 싣는다. 넘쳐나는 화학비료와 항생제 때문에 유기농업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 생존을 위한 농법인 것이다. 어느 날 우리 생활에서 석유가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90년대 초 쿠바에서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현실이었고, 경제의 80%가 붕괴된 이후 지금 이렇게 다시 일어선 것이다.

숙소인 ‘옥시텐탈 미라마 호텔Occidental Miramar Hotel’은 아바나 시내에서 상급의 호텔이라고 하였지만 곳곳에 비품이 낡아 있었고, 심지어 샤워기가 고장 난 방도 많았다. 어떤 날은 욕조에 물 막아두는 마개가 고장 나서 연락을 하였더니 그냥 뽑아주고 나서 팁 달라는 표시로 문 앞에 서 있는 게 아닌가! 한국이었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여기는 쿠바니깐, 황당함을 감추며 팁을 주었다. 여기서 잠시 쿠바 인민들의 화폐 구조를 들여다보면, 나에게 팁을 받았던 호텔 직원들의 경우 외국인이 사용하는 CUC를 만져볼 수 있으나 대부분의 쿠바인들은 내국인용 화폐인 CUP로 월급을 받는다. 두 화폐는 25배의 가치차이가 있다. 문제는 생필품이 부족하여 암시장이 형성되면서 외국 관광객들만 쓰라고 만들어놓은 CUC가 쿠바 인민들에게 통용되는 화폐로 전환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순식간에 물가가 25배로 뛴 셈이다. 현재 이중화폐 구조는 쿠바의 최대 골칫거리로서 연내 해결이 목표라고 한다.

둘째 날은 버스를 타고 4시간 반을 이동하여 산타클라라를 방문했다. 산타클라라는 체 게바라의 도시이기도 하여 체 박물관, 광장, 동상 등 혁명 당시 체의 활약상을 기념하는 곳이 많았다. 수년 전 가슴 뛰며 읽었던 체 게바라 평전에 산타클라라로 입성하는 체의 모습이 멋지게 묘사되어 있었는데,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 대형 동상이 서 있는 모습은 이 먼 곳까지 오게 한 이유로 충분했다. 동상 뒤 편에 자리한 혁명 영웅을 위한 작은 추모관과 체 박물관도 둘러보았다. 생전에 체가 쓰던 물건들, 활동 당시 찍은 사진들.. 소중히 보관한 각종 물건에서 체를 사랑하는 쿠바인들의 마음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체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도 다시 확인할 수 있었고,… 산타클라라의 밤은 럼주로 기억된다. 저녁에 도심으로 나가 한껏 멋을 낸 젊은이들과, 그들의 문화와, 시원한 밤바람과, 맛있는 럼주를 즐기는 시간이었다. 사실, 칙칙한 우리 일행이 그 물 좋은 클럽을 휘저어 놓은 것은 두고두고 부끄러웠다.

  셋째 날은 다시 버스를 3시간 반 타고 세계 3대 휴양지라 불리는 바라데로로 이동했다. 바라데로는 유럽인이나 캐나다인이 즐겨 찾는 유명한 휴양지로, 깨끗한 바다와 고운 모래를 가진 해변이 자랑거리이다. 도시 전체가 리조트로 이루어져 있어서 쿠바 다른 지역과는 확실한 차이가 있었다. 쿠바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굉장히 이질적인 곳이었다. 아쉽게도 우리 일행이 도착하는 날 비가 와서 해수욕을 즐기진 못했으나 힘든 여정에 지친 몸을 쉴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못 말리는 오지랖정신

다음날은 다시 수도 아바나로 이동했다. 오후에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을 방문하였는데 예전에 미해군기지였던 곳을 학교로 바꾼 곳이라 전망도 좋고 건물도 멋있었다.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은 가난한 외국 학생들에게 의과대학교육을 무료로 제공하는 학교로, 쿠바의 자랑거리 중 하나이다. 1990년대 중반 라틴아메리카 전역을 휩쓴 허리케인 등 자연재해로 인해 해외의료봉사활동을 나갔던 쿠바 의사들이, 근본적인 문제는 의사수의 부족이라 판단하여 (자기 나라도 가장 어려웠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1998년에 의과대학을 설립한 것이다. 현재 92여 개국의 가난한 나라 학생들이 참여하여 1만 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했고, 2만 명의 재학생이 있다고 한다.

졸업생들이 얼마 전 아이티 참사 때도 큰 활약을 보이는 등 쿠바국민들이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의 존재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만 했다. 치솟는 등록금에 의과대학 다니기가 힘들다는 우리나라를 생각해보면, 국내는 물론이거니와 해외에서도 돈이 없어 의과대학에 다니지 못하는 학생들을 포용해주는 쿠바의 정신은 큰 울림이 된다. 쿠바의 이런 정신은 백신 연구 분야에서도 엿볼 수 있다. 미국으로부터의 철저한 통제 속에 정상적인 의약품 공급을 받지 못하던 쿠바는 가장 어려웠던 시절에도 생명공학분야에 투자를 아끼지 않아 현재 신약 및 백신 개발 등 많은 성과를 내고 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쿠바 국내에서 이미 근절된 전염성 질환들에 대해서도 연구를 지속하여 주변 국가들에게 백신을 공급하고 있는 것이다. 쿠바의 이런 오지랖 정신은 곳곳에서 나를 감동시켰다. 또한 자본주의 체제의 눈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이런 모습들이 쿠바 체제를 지속시켜나가는 힘이라고 느끼게 해주었다.

일정 닷새 째날, 마침내 내가 가장 보고 싶어 한 쿠바의 일차의료기관을 견학하는 날이다. 무상의료의 나라 쿠바, 나는 그 근간을 이루는 것은 탄탄한 일차의료라고 들어왔다.   생활수준은 후진국이지만 국민들의 건강만큼은 선진국에 결코 뒤지지 않는 쿠바, 그 현장을 보게 된 것이다. 우리가 방문한 곳은 폴리클리니코라고 하는 곳으로 지역주민 15000여명을 돌보는 의료기관이다. 가정의학과, 내과, 부인과, 안과, 재활의학과, 치과 등등 필요한 과들이 다 있고, 그 날 방문한 ‘마나구와 폴리클리니코’에는 의사 38명, 간호사 64명, 그 외 사회복지사, 행정직원 등이 근무하고 있었다. 간단한 수술 정도는 하고 있으며 입원실은 없고 한 달에 900명 정도의 환자를 본다고 한다. 폴리클리니코보다 더 지역밀착형으로 콘술또리오라고 불리는 의료기관이 있는데 여기는 가정의학과 의사 한 명이 지역주민 1000명 정도를 관리하며, 이런 콘술또리오 15개소 정도를 폴리클리니코 한 곳이 담당하는 시스템이다. 따라서 이곳 의사 38명에는 주변 콘술또리오 의사 16명도 포함되어 있다. 시설은 우리나라 의료기관과 비교하면 많이 낙후되어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은 과도한 시설투자로 점철된 한국 의료에 익숙해진 나의 시선일 뿐일 수도 있다.

콘술또리오 의사들은 오전에는 보통 자신의 집1층에 있는 클리닉에서 진료를 보고, 오후에는 왕진을 하며 지역주민들의 생활환경을 살피고 거동 불편한 환자들을 돌본다고 한다. 예전에 쿠바에는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기 때문에 이런 시스템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작년 말부터 주택의 매매가 허용되었다 하고, 예상과는 달리 내가 다니는 콘술또리오의 의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며 다른 의사를 찾아가는 것도, 콘술또리오를 거치지 않고 폴리클리니코로 바로 가는 것도 가능하다고 한다. 물론 대기시간이 길고 물자가 부족한 현실은 인정하지만, 적어도 돈 걱정하면서 병원 가기를 주저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정말 부러운 일이었다. 이를 당연하게 여길 것 같은 쿠바 사람들도 어릴 때부터의 교육을 통해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이런 환경에서 진료하는 것이 내 로망의 최고봉인데,… 이루어질 수 있을까?

오후에는 헤밍웨이 생가에 들렀다. 수도 아바나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의 가장 경치 좋은 곳에 자리한 저택이었다. 완벽히 보존된 침실, 욕실, 식당이며 요트, 친구들을 위한 별채, 기르던 개들을 위한 무덤까지,… 당연했겠지만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헤밍웨이의 부자로서의 면모를 알게 되었다. 심지어 집안 곳곳에 설치된 동물들의 박제는 그간 헤밍웨이를 생각할 때 떠올렸던 이미지와 참 이질적이었다.

 

가장 약한 자에게 최적인 시스템

마지막 이틀 동안은 노인들은 위한 시설, 장애인을 위한 시설 등을 둘러보는 프로그램 이었다. 노인요양시설에 들어서자마자 노랫소리가 나서 봤더니 어르신들이 우리 일행을 환영해주시느라 입구에 모여서 합창을 하고 계셨다. 연세가 무색할 만큼 아름다운 노랫소리와 아늑한 공간이 어우러져 참 좋았던 기억이다. 건강수준만큼은 선진국과 동등한   쿠바답게 이 곳에서도 노인건강문제는 큰 이슈였다. 이 곳은 의사, 치과의사, 간호사, 심리상담사 등 10여명의 직원이 팀이 되어 80여명의 노인들을 돌본다고 하였다. 쿠바 정부에서는 지속적으로 증가할 노인 인구를 고려하여 사회 복귀를 위한 노인의 집에서 완전 케어가 필요한 노인의 집까지 목적 별로 각종 시설을 확충하고 있고 마지막에는 노인아파트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솔직히 노인시설이야 일본을 견줄 곳이 없지만 엄청난 GDP의 차이를 생각한다면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싶다.

다음날 방문한 다운증후군 환자들의 집은 더 놀라웠다. 넓은 부지 위의 쾌적한 환경 속에 다운증후군뿐만 아니라 정신지체장애아 226명이 모여 있는 곳으로, 6세 이후의 아이들이 교육받고 있었다. 시설 속에는 작은 학교도 있고 졸업 후에는 공예, 제빵, 정원가꾸기 등 독립할 수 있는 일을 배우는 시스템이 함께 갖추어져 있다. 절반 정도는 시설에서 숙식을 하며 나머지는 집에서 다니는데 직원만해도 의사, 간호사, 심리학자, 특수교사, 체육교사, 음악교사 등 242명이나 되었다. 시설 내 작업장에서 물건을 만들어 판매를 하기도 하는데 놀랍게도 작업장 내 노동조합이 있어 노조활동을 하고 있었다. 물론 일반인들처럼 해내지는 못해서 주변 직원들이 도와준다고는 하지만, 자칭 초일류기업도 갖지 못한 노동조합을 쿠바의 장애인 노동자들이 갖고 있는 것이다. 이 나라는 가장 약한 사람들이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이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체 게바라의 딸, 알레이나 게바라와의 만남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 가장 가슴 떨렸던 순간은 체 게바라의 딸 알레이나 게바라와의 만남이었다. 알레이나 게바라는 소아과 의사이고 현재 체 게바라 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우리 일행은 한 시간 정도 미팅을 가졌는데 아버지 게바라와의 추억, 체 부부의 연애 이야기, 미국의 봉쇄정책에 대한 비판, 반핵문제에 대한 확고한 신념 등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때로는 푸근하게 때로는 카리스마 있게 청중을 휘어잡는 모습에서 체 역시 저런 면모로 쿠바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겠구나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난 너무 떨려서 (혹은 황송하여) 차마 같이 사진을 찍진 못했다. 지금은 조금 후회된다. 그리고 미팅 내내 저런 지도자를 가진 쿠바 국민들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체 게바라 연구소에서는 체와 관련된 책을 만드는 일도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가장 최근에 발간된 책은 아직 우리나라에 들어오지 못했다. 한-쿠바교류회에서 이 책을 번역하여 우리나라에서 출간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 때에 맞춰 알레이나 게바라를 초청하고 싶다고 하니 기꺼이 와주시겠다고 했다. 까다로운 초청절차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알레이나 게바라의 한국 방문은 생각만해도 흥분되는 일이다. 인의협 뿐만 아니라 진보적인 보건의료 진영에 축제 같은 그 날이 오길 기대한다.

 돌아오는 길은 육체적 피로와 귀국 후 펼쳐질 일정들에 대한 걱정으로 좀 더 힘들었다. 아바나에서 토론토로 넘어올 때 한달 간 혼자 배낭여행을 했다는 치전원 학생과 우연히 만나 얘기를 나눴는데, 그런 식의 여행도 꼭 해봐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우리처럼 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어떻게 보면 그들이 보여주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고 온 여행도 의미 있지만, 진짜 쿠바인들 틈에 섞여 그들과 친구가 되어 얘기를 나누는 것은 우리 팀이 해보지 못한 특별한 경험인 듯 했다. 일행 중 먼저 9박 10일의 일정만 소화하고 먼저 귀국하는 나를 포함한 4명 이외에 나머지 14명은 이후 3일간의 일정 동안 그런 시간을 보냈을 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 다시 만나서 꼭 그 얘길 들어봐야지 했는데 귀국 후 아직 만남을 가지진 못했다. 18명의 우리 일행 중 대부분은 지역 공동체 운동, 슬로푸드 운동, 환경 운동 등을 하시는 분들과 전교조 활동을 하시는 선생님들이셔서 내가 요즘 한참 관심을 갖고 있는 의료생협에 대해 관심을 갖고 많이 지지해주셨다. 그리고 쿠바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공통된 느낌을 가질 수 있어 좋았다. 물론 여행 과정 중간중간 의견이 안 맞는 부분도 있었지만 어쩌랴, 생판 모르고 지내오던 사람들이 9박10일 부대끼며 지내야 했으니 어쩔 수 없지 싶다. 혹시 이 글을 읽으면서 나도 쿠바에 가고 싶다!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공식적인 일정과 개인적인 일정이 반반 정도 균형을 이루는 계획을 짜고 가시기를 추천 드린다.

쿠바 국민들은 가난하다. 국가 배급으로는 겨우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만 허기를 채울 수 있고, 물가는 높고, 평생 외국여행 한 번 가는 게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할까? 여행 전에 가졌던 물음에 대해서는 아직 확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순 없다. 그들의 속마음까지 들여다보기에 일주일은 너무 짧았고, 대부분 국가기관이 안내해주는 곳에서 공식적인 설명을 들으며 여러 기관을 방문했던 터라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 삶의 가장 근간이 되는 교육, 의료, 각종 복지가 탄탄하고,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주저 없이 말하는 쿠바 국민들이 불행할까? 절대 그럴 것 같지는 않다.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다음에는 좀 더 길게, 그들의 삶 깊숙한 곳을 느껴보고 싶다. 그 때까지 나의 쿠바앓이는 계속될 것 같다.<끝>

Reference

  1. 요시다 타로, 2011, 《몰락 선진국 쿠바가 옳았다》, 서해문집
  2. 요시다 타로, 2011, 《의료천국, 쿠바를 가다》, 파피에
  3. 천샤오추에, 2007, 《쿠바 잔혹의 역사 매혹의 문화》, 북돋움

이 글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에서 발간한 [사람과 의료] 2호에 실렸던 원고임을 밝힙니다. 

 

박지선  jisnf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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