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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령 410호, 부랑인 대감금의 역사

국가가 자행한 감금과 인권유린의 역사② 백재중l승인2015.01.24l수정2015.02.27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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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IMF 사태 이후 도시에 노숙자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는데 그 이전에도 부랑인이라는 이름으로 노숙을 하거나 할 일없이 도시를 배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우리사회의 산업화, 도시화와 맞물려 나타난 새로운 아웃사이더였다.

1950년대 한국전쟁이 끝나고 수많은 전쟁고아들이 발생한다. 전쟁고아들 그리고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한 아동들은 갈 곳이 없이 도시를 배회하는 부랑아로 전락하였고 이들을 수용하는 시설들이 곳곳에 들어선다.1960년대 중반 최고조에 달했다가 1970년대 들어서 아동 개념으로서의 부랑아는 크게 감소하게 된다. 대신에 급속한 도시화에 따라 이농하였으나 제대로 도시에 정착하지 못한 사람들이 부랑인이라는 이름으로 이 자리를 채우게 된다.

1970-80년대 군사독재 시설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농촌의 인구가 이탈하여 도시로 몰려들었고 일부는 도시의 부랑인으로 전락하여 도시를 배회하였다. 군사정권이 보기에 이들은 미관상의 문제로 정상인의 시야에서 사라져야 하는 존재였으며 해결 방법은 극히 군대적인 방식이었다. 해결책은 도시를 배회하는 부랑인을 시설에 감금하는 것이었다. 그 시발점은 1975년 12월 제정된 내무부 훈령 410호였다. 이 훈령은 초법적인 것이었다. 단지 부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시설에 가두는 것이 가능해지게 된다.

당시는 유신정권의 강압적 통치가 날로 더해 가고 있던 시기였다. 1975년 들어서 학생들의 반유신 시위가 격화되자 5월 13일 박정희 정부는 긴급조치 9호를 발령하였다. 긴급조치 9호는 헌법비방이나 반대를 금지하고 유언비어 유포나 시위 등을 금지하고 있었다.

긴급조치 9호 발령 직전인 4월 초 인혁당 사건에 연루된 8명에 대해 사형 선고가 내려졌고 20시간도 안되어 사형이 집행되었다. 긴급조치 9호의 발령과 더불어 각 학교의 학생자치활동의 구심체인 학생회가 폐지되고 준군사조직인 학도호국단 체제로 전환되고 수많은 써클이 폐쇄되었다. 6월에는 서울 시민 모두를 대상으로 주거를 확인하고 통반장들을 통한 주민 통제를 강화하였으며 7월에는 사회안전법이 제정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형법, 군형법, 국가보안법, 반공법으로 형을 살고 나온 사람들에 대해, 개전의 의지가 비춰질 때까지 임의대로 구금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8월에는 민방위기본법이 제정되었다.

12월에는 내무부 훈련 410호인 <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조치 및 사후 관리에 관한 업무 지침>을 제정하면서 부랑인에 대한 대감금의 역사가 시작된다. 훈령 410호에는 부랑인을 “일정한 주거가 없이 관광업소, 역, 버스정류소 등 많은 사람이 모이거나 통행하는 곳과, 주택가를 배회하거나 좌정하여 구걸 또는 물품을 강매함으로써 통행인을 괴롭히는 걸인, 껌팔이, 앵벌이 등 건전한 사회 및 도시질서를 저해하는 모든 부랑인을 말한다”고 정의하고 있으며, 훈령을 제정한 목적은 “범법자, 불순분자 등의 활동을 봉쇄하는 것”이었다.

훈령 410호는 1975년 공포정치 아래서 사회통제를 위한 일련의 조치의 연장 속에서 탄생하여 부랑인 대감금의 행정적 근거로 작용하였다. 긴급조치 9호가 1979년 박정희 사망 후 폐지된데 비해 이 훈령은 전두환 정부에서도 계속되었으며 이전보다 오히려 통제가 더 강화되었다

부랑인 감금의 역사는 전두환 정부 시절 삼청교육대에서 절정을 이룬다. 삼청교육대는 1980년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 및 계엄포고령 제 19호에 따라 설치된 군대식 강제수용소였다. 군과 경찰에 의해 영장 없이 검거된 시민의 수가 6만 명을 넘었다. 1981년 1월 24일부로 계엄령 해제에 따라 해체되었으나 수용자 중에서 7,478명은 보호감호처분을 받아 1-5년의 강제노동을 감내해야 했다.

▲ 1981년 4월 10일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국무총리에게 내린 지시(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81년 4월에는 대통령이 국무총리에게 “근간 신체장애자 구걸행각이 늘어나고 있는바 실태 파악을 하여 관계 부처 협조 하에 일절 단속 보호 조치하고 대책과 결과를 보고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문서를 내려 보냈고 이에 따라 8일간 1,850명을 단속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아래서 부랑인에 대한 단속은 강화되었고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올림픽게임을 앞두고는 더욱 더 극성을 부리게 된다.

감금 방식의 부랑인 대책은 결국 무고한 시민의 대감금을 초래하고 최악의 인권 유린으로 귀결된다. 감금의 참혹한 결과는 1987년 형제복지원 사건을 계기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지금까지 ‘한국판 홀로코스트’로 불리고 있다.

형제복지원은 1975년부터 부산시와 협약을 맺고 부랑인 수용시설로 시작된다. 3,500여 명이 수용되어 있던 당시 전국 최대의 부랑인 수용 시설이었다. 길에서 잠자던 사람, 술 취한 사람, 혼자 노는 어린이 등 강제로 사람들을 데려가서 수용 감금하였다. 감금된 사람들은 대부분 시청 공무원, 경찰 등의 무차별 단속에 의해 수용되었다고 한다. 단속에 따라 실적이 매겨지는 구조여서 무리한 단속이 속출했다. 형제복지원 내부에서는 폭행, 감금, 강제노역, 성폭행 등 인권유린이 자행되었다. 기간도 정해져 있지 않은 무기한 감금이었다.

형제복지원은 박인근이라는 원장을 정점으로 하는 하나의 독립된 소왕국이었고 파시즘 국가였다. 이 공간은 밀폐된 공간으로 아무도 나올 수 없었고 존재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내무부 훈령 410호를 통해 국가는 이런 밀폐된 공간을 사회 곳곳에 만들고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이런 공간의 확대를 꾀하였다. 형제복지원 사건이 알려지기 전 해인 1986년 전국에 있는 36개 부랑인 시설에 1만 6천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형제복지원의 실태는 1987년 초 세상에 처음 알려져 조사가 이루어졌고 민주항쟁이 있었던 바로 그 해 6월에 모든 원생이 퇴소하였다. 당시에는 1975년부터 1986년까지 공식적으로만 513명이 사망한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으며 이후 추가 사망자가 확인되었다. 

부랑인 대감금의 역사는 잊혀진 역사가 되었다. 군사독재 폭압정치 아래 대감금이 진행되어 수많은 이가 희생되었으나 정확한 실태는 알 길이 없다. 대감금 정책의 희생자는 부랑인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에 국한되지 않았다. 부랑인이라는 용어의 적절성도 문제이지만 당시의 일반적 관념으로서 부랑인이라는 범주로 분류하기 어려운 사람들도 포함된다. 부랑인 대감금의 출발점이었던 훈령 410호는 국민을 억합하고 통제하려는 폭압정치의 기제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백재중  jjbaik99@g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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